동네사람들 '원격조종'하는 옆집 할머니

등록 2004.11.24 00:45수정 2004.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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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 앉아 있는 옆집 할머니
배추밭에 앉아 있는 옆집 할머니오창경
"제선 엄마, 우리 밭에 한번이라도 가보고 있는겨? 요새 가물어서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줘야 하는디. 내가 몸은 서울에 와 있어도 맘은 온통 거기 우리 배추들한테 가 있당께."


시동생 장례식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딸네 집에서 며칠 머물게 된 옆집 할머니는 우리 텃밭에 심은 배추 안부가 궁금해서 저한테 이렇게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 뒤늦게 놀고 있는 우리 빈 밭에 김장거리를 심은 옆집 할머니는 무늬만 농사꾼인 우리보다 열심히 밭을 돌보고 가꾸었습니다. 마흔 네 살에 혼자 돼서 작년까지 모시를 짜서 5남매를 가르쳐 내보낸 옆집 할머니는 올해부터는 힘에 부쳐서 모시짜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냥 저냥 세월을 소일하던 할머니가 우리 빈 밭에 배추나 심자고 한 것이 어느새 무, 마늘, 양파, 시금치, 쪽파까지 요모조모 알뜰하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봄에 고추나 콩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을 하고 나면 잡풀들이 무성한 채 잊혀진 우리 밭이 겨울에도 그 쓰임새를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옆집 할머니 덕택입니다.

오창경
옆집 할머니가 문 앞에 '운동장 채소밧태가 있습니다'라고 쓴 쪽지까지 붙여 놓고는 짧은 가을 날을 대부분 텃밭에서 보내자, 마실을 왔던 동네 사람들이 우리 텃밭으로 할머니를 찾아오면서 우리 텃밭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배추를 심고 밭이랑을 만들고 하는 일은 할머니와 함께 했지만 농사일이 몸에 배지 않아 건성인 우리와는 달리 옆집 할머니의 텃밭에 들이는 정성은 과히 어린아이 돌보는 수준입니다. 작년까지 외손자인 용석이를 돌볼 때도 못 보던 애정 어린 눈빛을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엊저녁에 못 나와 봤더니 우리 배추들이 오늘은 주인 할머니가 안 오시나 하며 기다리는 것 같아서 잠도 설쳤다니께. 시금치는 빨리 솎아달라고 하고, 쪽파들은 밤새 잘 주무셨냐고 나한테 인사를 하는 것 같드라니께."

농사를 짓는 건지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이렇게 옆집 할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배추들과 대화를 나누고 쓰다듬어 준 덕택에 척박하기만 했던 우리 텃밭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옆집 할머니 덕을 톡톡히 보며 느긋하게 김장할 날을 기다리던 나한테 텃밭 돌보는 일이 돌아 온 것은 옆집 할머니의 오랜 출타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시동생의 부고를 받고 서울에 올라간 할머니는 무려 보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사이에 햇살도 따갑고 비 한 번 내리지 않는 건조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이틀이나 사흘이면 서울에서 일을 보고 내려와서 텃밭에 꼬부리고 앉아 있을 줄 알았던 할머니는 외유가 길어지자 이틀이 멀다하고 저한테 전화를 넣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옆집 할머니의 전화 채근에 마지못해 오랜만에 텃밭에 나왔더니 왠지 옆집 할머니가 있을 때는 생기가 돌던 채소들이 기운을 잃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도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며 저도 배추들과의 대화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안녕, 배추들아. 할머니가 서울에 가셔서 오늘은 내가 물을 준다. 맛있게 먹어라."

한평생 해온 농사일이 몸에 붙어서 본능이 되어버린 옆집 할머니의 발길과 이제 시골 살이에 적응을 한 생초보인 우리의 발길을 배추들도 알아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익숙한 손길이 그립다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 쯤 물을 준 것으로 만족을 한 나는 텃밭에 가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텃밭 가꾸는 일이 우선 순위가 아닌 우리는 할머니만큼 정성을 쏟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채소 생태에도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만하면 잘 자라려니 했습니다.

시골 사람 흉내만 내고 있을 뿐 몸으로 하는 일보다 머리로 하는 일에 익숙한 근성을 버리지 못한 우리에게 텃밭 돌보는 일이 아직도 몸에 붙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무수(무)는 겉잎파리를 떼어줘야 밑이 드는겨. 노인네가 서울서 제선네 못미덥다고 가보라고 성화를 대서 왔다가 아예 내가 떼 주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떼 왔으니 짠지 담으려면 담고 시래기로 말리려면 말리랑께."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보니 뒷골 아줌마가 무청을 한 다발이나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허술한 텃밭 관리를 못 믿은 옆집 할머니는 서울 딸네 집에서 전화로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 것입니다.

"새벽 댓바람부터 노인네가 전화로 쪽파랑 알타리 무수 좀 솎아 달라고 혀서 와 봤다니께. 채전밭 못 믿어서 어치게 서울서 앉어있는지 몰러."

오늘은 은경이 엄마가 우리 집 텃밭 일에 불려 나와 싫지 않게 투덜거리며 알타리 무를 솎아주고 갔습니다. 마치 젖먹이를 미숙한 보모한테 맡기고 간 듯 옆집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원격 조종해 우리 텃밭에 다녀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 후에도 내가 텃밭에 나가 볼 때마다 동네 사람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던 덕에 나는 우렁각시가 차려놓은 밥상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텃밭은 동네 사람 모두의 텃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배추들이 인제서야 나를 보고 웃고 무수 이파리들은 고맙다고 하쟎여. 제선 엄마는 그런 거 아는감? 물이 부족해서 벌겋게 타들어 가던 쪽파들도 주인네를 알아보고 퍼렇게 살아나는 게 안 보이남?"

할머니가 출타한 동안 동네 사람들이 번갈아 다녀갔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가는 비 한 자락 오지 않은 탓에 우리 텃밭에도 물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보름 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할머니는 식전에 벌써 텃밭을 한바퀴 둘러보고 물을 대주고 왔습니다.

"제선 엄마, 오늘은 양파 묘 좀 사다가 심어야 하니께 장에 좀 같이 가자고."

김장철이 내일 모레이고 엄동설한이 코 앞인데 우리 텃밭에는 아직도 뭔가 심을 일이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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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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