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부시가 재선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의 정리가 끝나지 않고 있다.
난생 처음 소액이나마 정치헌금을 선거 전략상 중요지역인 오하이오 민주당에 보냈고 직장도 가기 전에 투표부터 했다. 내가 하도 낙담을 하니까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부시가 우리 가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자기 엄마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 어떻게 미국은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는가?
부시의 재선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다수결 투표제도에 대한 나의 신뢰와 부시가 재선되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 속에서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의 믿음과 실제로 경험한 사실이(또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이) 모순됨을 깨달을 때 느끼는 심적 불편함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인데 사람들은 이런 인지 부조화를 줄이기 위하여 자기 믿음을 바꾸거나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려고 한다.
결국 내가 부시 재선에서 느끼는 인지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거나 아니면 이번 대선에 부정이 있었다고 믿거나 아니면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를 바꾸어야 한다.
세 가지 중에서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를 재검토해 보기로 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대체 미국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덕에 명문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에 의하면 그는 최악의 학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업시간 중 뒷자리에 앉아 어린 학생들이나 할 만한 장난이나 하고, 경제 토론을 하면 빈곤의 이유는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자기는 베트남 전쟁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러면 너는 왜 주 방위군으로 남았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연줄로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부시와 자주 접했던 어떤 상원의원에 따르면 부시는 아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잘 이해하고 보완한 사람들인데 부시는 평생 집안에서 뒤치다꺼리를 해줘서 자기 약점을 보완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부시가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세계지도자로서 수준 이하라는 생각이 든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을 보면 논리도 없는 사람 같고 어떨 때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부시의 나쁜 점만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젊은 시절 술만 먹고 지냈어도 새 출발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대통령이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부시의 인간성이나 지적 능력에 대한 나의 평가가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
나는 또 부시의 정책이 미국과 세계를 망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을 빛더미 위에 올려놓고 대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세계환경보호조약도 서명하기를 거부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경제나 환경문제에 대하여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의 정책이 미국과 세계에 정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미국인 과반수의 지지를 받았는데 설마 5천만명이 넘는 부시 지지자들이 바보란 말인가? 내가 물론 틀렸을 수도 있다.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 중에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양보할 수 있어도 한 가지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도덕적 가치관의 문제다.
선거 분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부시가 선거에서 이긴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도덕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을 헌법으로 막으려 하고 낙태를 금지하려 하는 태도 때문에 보수세력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부시는 보다 중요한 의미에서 도덕적 가치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었고 죽어 가는가? 통계에 의하면 이제까지 미군도 1200명 넘게 죽고 부상자가 1만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약 9000명).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는가? 확인되는 이라크인 사망자 수가 1만5000명 정도인데 십만명 가까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시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거나 팔 다리를 잃을 것인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가? 오히려 이라크 전쟁 때문에 테러의 위험이 더 커지지 않았나? 이라크가 9·11 사태를 일으켰다느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느니 하는 이유가 사실이 아님이 미국 의회가 만든 조사위원회에 의하여 밝혀졌다.(부시 지지자들 75%는 아직도 이라크가 9·11을 일으킨 알 카에다와 관계가 있고 이라크가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이라크에 친미 정권을 세우면 미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이론을 부시가 실행해 본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아마 부시나 신보수주의자들이 자기 자신들이나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야 했다면 결코 그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모병제인 미국에서 실제로 총을 들고 나가야 할 저소득층 병사들과 미국 폭격기가 떨어트리는 포탄에 죽어갈 죄 없는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식으로 사람 목숨이 소중한지 모르고 명백한 이유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고 있었고 그런 믿음을 바꿀 수가 없다. 아마 나는 계속 '인지 부조화'가 가져오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부시 얼굴이 TV에 비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앞으로 4년을 살아야 하나 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