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한성희
눈앞에 펼쳐지는 낙엽과 겨울 나무들. 충분한 시의 소재이고 영혼인데 왜 안 들릴까? 걷다가 멈춰 서서 주먹으로 머리를 쾅쾅 친다. 막힌 영혼이 대답으로 돌아온다.
시를 안 쓴다고 해서
더 평온하지도 않을 거고
더 행복하지도 않겠지요?
얼마 전 어느 시인에게 온 메일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 더 평온하지도 더 행복하지도 않겠지요? 얄미울 정도로 정답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시 쓰는 일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걸 즐기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인은 나에게 시를 쓰면서 괴로움을 즐기라 요구한다. 회피하고 나니 편하고 좋았던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다시 가라고 압박한다. 시인의 핏줄에는 씻을 수 없는 전생의 죄인 피가 흐르는데 죄인의 굴레에서 도망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시를 써서
무엇을 이루겠다 거나
무엇을 얻겠다 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쓰고 사는 것보다는
쓰고 사는 것이
여생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이 공릉 숲 속을 거닐 때마다 내 귓전을 때리는 이 말이 계속 맴돌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브와 아담처럼, 아니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처럼 내쫓기고 외면 당한 무서운 고독이 항상 맴돌 것이라는 걸 안다.
시를 써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 있는가? 얻겠다는 욕심을 가진 자가 시를 쓸 수 있는가?
시인은 정답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수백 년 전 죽은 자의 무덤 근처에서, 새삼 시와 삶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떨어진 낙엽의 실핏줄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봐도 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