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 시, 동물들

공릉 숲에서 만난 것들

등록 2004.12.01 10:45수정 2004.12.0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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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인생이란 단어를 쓰면 괜히 진지해지고 쑥스럽지만 인생을, 어쩌다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있다. 겨울답지도 않은 날씨 때문에 창 밖 온도를 어림짐작으로 판단하고 두터운 겨울 점퍼나 겨울 외투를 입고 나갔다가 다른 사람들의 차림을 보고 당황한 적이 여러 번이다.

"혼자 한겨울 만났어?"


11월이 다 갔는데 그럼 한겨울 아닌가? 추위라면 지레 겁먹고 벌벌 떠는 습관이라, 있는 대로 껴입고 나가서 얇은 가을 옷차림 속에 머쑥해진 경험이 이번 겨울은 많다. 왜 겨울답지 않은 거람?

공릉을 갔을 때도 나는 두터운 겨울 곰 같은 점퍼 차림이었다. 숲을 걷노라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더위가 몰려오지만 미련한 오기로 그냥 껴입고 걷는다.

겨울 숲
겨울 숲한성희
누런 낙엽은 밟는 대로 사가사각 소리내며 리드미컬하게 소리치지만 낙엽의 원초적인 비명소리, 그 이상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낙엽의 말이 정말 안 들린다.

시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써야 한다. 보이는 낙엽은 있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낙엽은 소리뿐,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손으로 쓰지 못하지.

요즘 계속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대신 한다.


시를 안 쓰기로 했습니까?
못 쓰고 있습니까?


둘 다 맞다. 못 쓰고 있고 안 쓰고 있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낙엽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는 건, 시를 안 쓰고 못 쓰고 있어서 안 들리는 것이다.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간단한 의문을 다시 되짚는다. 시를 안 쓰기로 했습니까? 시를 못쓰고 있습니까?

숲
한성희
눈앞에 펼쳐지는 낙엽과 겨울 나무들. 충분한 시의 소재이고 영혼인데 왜 안 들릴까? 걷다가 멈춰 서서 주먹으로 머리를 쾅쾅 친다. 막힌 영혼이 대답으로 돌아온다.

시를 안 쓴다고 해서
더 평온하지도 않을 거고
더 행복하지도 않겠지요?


얼마 전 어느 시인에게 온 메일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 더 평온하지도 더 행복하지도 않겠지요? 얄미울 정도로 정답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시 쓰는 일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걸 즐기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인은 나에게 시를 쓰면서 괴로움을 즐기라 요구한다. 회피하고 나니 편하고 좋았던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다시 가라고 압박한다. 시인의 핏줄에는 씻을 수 없는 전생의 죄인 피가 흐르는데 죄인의 굴레에서 도망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시를 써서
무엇을 이루겠다 거나
무엇을 얻겠다 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쓰고 사는 것보다는
쓰고 사는 것이
여생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이 공릉 숲 속을 거닐 때마다 내 귓전을 때리는 이 말이 계속 맴돌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브와 아담처럼, 아니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처럼 내쫓기고 외면 당한 무서운 고독이 항상 맴돌 것이라는 걸 안다.

시를 써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 있는가? 얻겠다는 욕심을 가진 자가 시를 쓸 수 있는가?

시인은 정답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수백 년 전 죽은 자의 무덤 근처에서, 새삼 시와 삶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떨어진 낙엽의 실핏줄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봐도 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겨울 소나무 가지.
겨울 소나무 가지.한성희

잠든 새의 부리를 흔들어 숲은
밤이면 곡선으로 비행한다

옷을 벗고 있던 문들이 쓰러진다

허리 꼬아 숲을 틀어쥔
칡덩굴들이 한 줌
별마저 움켜 하늘에
그늘로 얼룩지며 날개를 흔든다

지친 生의 잎사귀, 도시의 지붕에 내려앉는다

따라오는 먼지 품에 안고
한 바퀴 돌아 제 자리에 서는 숲

- 한성희 <수레바퀴의 숲> 전문


어쩌면 이 공릉 숲 속을 계속 걷는 동안 막힌 귀가 뚫릴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로 한없이 걷고 또 걸으면서 공릉 숲을 헤매는 것이 아닐지.

청설모
청설모한성희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낙엽 속의 초록 이끼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누가 소리치고 부른다. 공릉 관리 일을 하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능 사초지 잔디를 위해 기르는 잔디밭 쪽에서 걸어오며 손을 흔든다.

"엘크 못 봤어?"
"못 봤어요."
"이리로 갔는데."

요즘 공릉에는 어느 사슴농장에 도망친 엘크 종 사슴 한 마리가 들어와 숲을 휘젓고 다닌다. 이 공릉 숲의 동물 가족이 한 종 더 추가된 것이다. 그 동안 숲의 동물 가족들의 소란은 계속 됐다. 지난 번 숲에서 마주쳤던 흰 개와 검정 개 외에도 단골로 이 숲에 와서 고라니를 쫓아다니는 검정 개 한 마리가 더 있는 모양이다.

빨간 산수유 열매를 먹으려고 나무에 오른 청설모. 씨만 쏙 빼먹고 나머지는 땅으로 버린다.
빨간 산수유 열매를 먹으려고 나무에 오른 청설모. 씨만 쏙 빼먹고 나머지는 땅으로 버린다.한성희
고라니를 얼마나 못살게 굴며 쫓아다녔는지 달아나던 고라니가 숲을 막아놓은 담을 뛰어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다리가 부러져서 애처롭게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해 야생동물보호협회로 연락해서 실어갔단다.

공릉 쪽에서 능선을 따라 영릉까지 한 바퀴 돌자면 두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워낙 넓은 숲이라, 도망친 동물들이 있다고 해도 잡을 방법도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고라니 말고 멧돼지도 이 숲에 살고 있고 거기에 엘크 사슴까지 추가 됐으니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다. 참나무 낙엽과 도토리가 지천이라 엘크는 겨울 내내 이곳에서 잘 먹고 지낼 것이다.

숲의 낙엽과 풀. 혹시 저 풀은 사슴이 뜯어 먹은 것이 아닐까?
숲의 낙엽과 풀. 혹시 저 풀은 사슴이 뜯어 먹은 것이 아닐까?한성희

"그런 걸 찍어야지."

늘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아저씨들은 이런 저런 동물이 나타났다고 알려주면서 왜 그럴 때는 없냐고 안타까워한다. 엘크가 저쪽으로 갔다는 말에 카메라 셔터 누를 준비를 하고 영릉 숲 능선으로 올라갔다. 사슴이 날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능선을 다 다니고 살펴도 사슴 꼬리도 안 보인다.

이 숲에 살고 있는 한, 언젠가는 내 눈에도 띄겠지. 혹시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숲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슴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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