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부장품은 생명존중 사상

따스한 인간미 서린 능호

등록 2004.12.15 07:32수정 2004.12.1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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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숲 양지 바른 곳에 핀 봄꽃. ⓒ 한성희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니 공릉의 숲은 마치 봄이 돌아오는 양 푸른 잎이 돋는 것이 보인다. 낙엽의 계절이 지나가자 관리소에서는 숲 능선을 따라 숲길에 쌓여 있던 낙엽을 모두 청소해 버렸다. 산불 위험을 방지하고 숲을 관리하기 위해서이지만 낙엽 밟으며 숲을 걷는 재미가 없어진 것은 서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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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능선의 폭신폭신한 새빨간 흙. ⓒ 한성희

붉은 흙이 드러난 숲길을 걸으면 신발이 살짝 빠지는 흙의 부드러움이 발바닥에 밀착한다. 황토방 갈 거 뭐 있나, 여기가 자연 황토방인데. 영릉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의 흙 빛깔은 유난히 새빨갛다.

영릉 숲길을 한 바퀴 돌고나면 냇가에서 낙엽을 주워 신발에 묻은 붉은 진흙을 문질러 씻어내야 한다. 이 냇가는 밤이면 사슴과 노루와 고라니가 와서 물을 마시는 곳이다. 모습은 뵈지 않지만 변 무더기나 발자국이 찍혀 있어 다녀간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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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크 사슴 발자국. ⓒ 한성희

이 엘크 사슴은 겁도 없는지, 능의 산책길에도 발자국이 찍혀있는 걸로 보아 밤이면 숲에서 나와 능 안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모양이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곳이니 마음놓고 돌아다니겠지.

영릉 숲에서 나와 흙 묻은 신발을 씻고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소로 돌아오자 수표소의 이 여사가 황급히 부른다.

"조금 전에 어느 관람객이 와서 왜 공릉, 순릉이라고 이름을 붙였냐고 묻는데 대답해줄 수가 있어야죠."
"어디로 갔지요?"
"순릉 쪽이요."
"제가 가보지요."

들어가 찾아보니 아이를 동반한 엄마인 관람객이었다. 아이와 능의 유적답사를 하러 온 듯했다. 능의 이름을 어떤 여유로 짓는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질문을 할 정도라면 문화유적에 관심이 상당히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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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원비 장순왕후 공릉. ⓒ 한성희

공릉, 순릉, 영릉 등은 왕과 왕비가 죽고 난 뒤에 내리는 능의 이름이다. 이것을 능호라 한다. 이 능호가 붙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아주 재미있다.

태조 이성계의 능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원(元)과 쉬지 않고 운행되는 하늘의 도라는 의미의 건(健)을 따서 건원릉(健元陵)이라 했고 그밖에는 모두 외자 이름이다.

정종의 후릉은 숙종 7년(1681) 여러 가지 신중한 생각이 틀림없다는 뜻에서 후릉(厚陵)이라 했고,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는 83세까지 살도록 남편을 그리워하고 생각했다 하여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폐출되자 중종을 그리워하며 인왕산에 치마를 펼쳐놓아 치마바위의 유래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단경왕후는 살아서는 왕비로 복위되지 못하고 명종 12년(1557) 71세로 세상을 떠나, 영조 15년(1739) 3월 28일 비로소 능호와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중종반정으로 사랑하는 지아비와 생이별을 한 단경왕후는 죽는 날까지 따스한 손길이 그립다 해서 온릉(溫陵)이 된 것이다.

능호는 무덤 주인공의 성격을 인간적이고 솔직한 눈길로 평한 것이 보인다. 능호를 보고 주인공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주인공의 삶에서 능호의 유래가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선조, 중종 등의 묘호가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반면, 능호를 보면 어쩐지 조선시대의 국장제도에서 따뜻한 인간미가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장과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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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 ⓒ 한성희

조선의 국장제도뿐 아니라 고려의 장의 풍습을 봐도 중국보다 훨씬 앞선 사회제도라는 것이 보인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검소하고 절약하라는 국가 정책에 의거해 13일에서 44일까지 장례기간을 정했고,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야 주자의 '주자가례'를 도입해 3개월 상을 고수했다.

부모가 늙으면 산에 먹을 것을 주고 내다버린다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야만적인 고려장은 실제 고려에는 없던 제도이다. 고려 성종9년(990)부터 인종4년(1126)까지 현종 즉위년(1009) 7월 신미일, 문종11년(1057) 7월 갑오일 등, 15회에 걸쳐 80세 이상 노인을 궁궐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비단을 나눠줬다('高麗史'世家)는 경로잔치 기록이 있어 근거 없는 전설임을 증명하고 있다.

왕이 죽으면 사람이 따라죽는 순장제도는 고대사회에서 있던 풍습이고 우리나라는 신라 지증왕 때 순장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오래 전에 순장이 없어졌다. 순장대신 상징적인 토용을 만들어 무덤에 넣는 것이 발전된 사회형태이지만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까지 순장제도가 있었다.

명에서 조선에 요구했던 것 중 하나가 처녀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조선초기에 뽑혀 끌려간 공녀들의 신분을 보면 사대부 집의 딸이었고 명의 요구대로 용모가 아름다워야 했다.

세조의 정유재란 거사에 한명회와 함께 일등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른 한확의 누이는 둘 다 명에 끌려가는 비운을 맞는다.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인 한씨 처녀는 태종 17년(1417) 명에 끌려가자 기품있는 아름다운 미모와 영리함을 갖춰 영락제의 눈에 들어 비로 봉해진다. 그러나 세종6년(1424) 명의 황제 영락제가 죽자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해 죽게 된다. 이 비극의 여인이 공헌현비 한씨이다.

공헌현비 한씨와 궁인 30명을 뜰에 모두 모아놓고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밥을 먹인 후, 마루에 올라가라 하니 울음이 진동했다. 의자에 올라가 매달린 올가미에 목을 걸고 유모 김흑에게 "낭(娘)아, 나는 갑니다"는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환관이 의자를 빼내 죽었다(세종실록권26).

세종10년 10월4일, 미모로 소문났던 한영정의 막내딸이 처녀를 바치라는 사신의 집요한 요구에 또 가게 되자, 명으로 가는 한씨 처녀의 행차를 보던 사람들은 언니가 죽었는데 또 끌려간다고 한탄을 했다(세종실록권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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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목 밑 낙엽 속에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살아있다. ⓒ 한성희

생전의 물건과 가축, 사람을 고스란히 집어넣던 순장제도는 사회제도가 발전함에 따라 상징적인 물건으로 대체한다.

중국여행을 다녀와 거대한 황제릉을 보고 조선왕릉을 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하지만 원시적인 잔인성을 벗어나지 못한 순장을 최소한 15세기까지 고수하던 중국과 생명의 존엄성을 실천한 우리 조상이 과연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작고 거칠고 추악하게 만들어 살아 생전의 물건을 대신하는 조선왕릉의 명기는, 장례의 예는 지키되 정신세계에 더 비중을 두고 생명을 존중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부장품을 보면 악기류에 아쟁, 대쟁, 비파, 향필률, 대금, 가야금 등, 작게 만든 악기를 넣고 목가인(木歌人) 8명, 목공인(木工人) 33명을 함께 넣어 상징성으로 그친다.

또 순장 대신 넣는 목비(木婢) 50개, 목노(木奴) 50개, 목안마(木鞍馬) 2개, 목산마(木散馬) 2개를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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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 한성희

왕비의 무덤에는 화장품이 들어가는데 나무로 만든 목비녀, 대나무 빗, 나무빗, 지분통, 거울 등 넣어 생전의 물건을 대신했다.

잔, 술병, 향로, 그릇들은 자기로 만들지만 아주 작고 거칠며 보잘 것없다. 수저와 접시, 밥상 등도 나무로 만들어 검은 칠을 하거나 칠하지 않는 소박한 물건들이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도 발굴되는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중요한 유품이다. 조선왕릉의 지석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청옥산의 청석을 채취해 개석과 밑돌, 두 개를 만든다.

연재를 쓰면서 감탄을 거듭할 정도로 철저하게 기록을 남긴 조선왕조의 실체는 알면 알수록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더 있을지 궁금하다. 요즘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나와 일반에게 잘못 알려진 조선역사를 바로 잡는 큰 역할을 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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