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69회

등록 2004.12.03 07:48수정 2004.12.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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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배신(背信)

그들이 아홉 번째 시체를 발견한 것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한 새벽이었다.


“이게 마지막인 것 같군.”

구양휘의 말에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주 잔혹한 놈들이오. 처음에는 쫓기는 척 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모두 추살해 버렸소.”

시체는 지금까지 보아온 여덟구의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상대는 세명… 하지만 아홉 명의 화산제자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소. 더구나 이 사람은 나이로 보아 화산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화산 장문인의 사제인 화산오검(華山五劍) 중 매봉신검(梅?神劍) 탁일항(倬壹恒) 같군. 검을 들면 매화 향기가 오장 이내에 가득 찬다고 하는 초절정검수지.”

구양휘는 강호에 대한 견식이 풍부하다. 물론 입고 있는 옷이라던가 얼굴 생김새 등으로 추측해 내는 것이지만 죽은 시체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각파의 중요 인물들은 머리에 담고 있다는 말이 된다. 화산오검의 명성은 적은 게 아니다.


어제까지 찬란한 위명을 드날렸던 인물이 이렇게 한순간에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다.

“죽은지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았소.”

그의 말에 시체를 살피던 담천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넨… 참 볼수록 신기하군.”

갑작스런 구양휘의 말에 담천의는 몸을 일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

“강호의 경험도 없는 것 같은데 이 어둠 속에서 끝까지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란 거 말이야. 중간에 분명 다른 쪽으로 유도했던 것 같은데 자네 덕에 계속 뒤따를 수 있었어.”

추적술이란 것은 경험이 풍부해야 사실 그 능력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담천의는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를 추적해 왔다.

“좀 배웠지요.”

“아니야. 추적에 관한 한 자네 능력은 특이할 정도로 뛰어나군.”

칭찬은 언제나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 더구나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듣는 칭찬은 더욱 그렇다.

“그건 그렇고…. 그 뛰어난 실력으로 그들을 계속 추적할 수 있겠나?”

상대가 누군지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표정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추적이 가능하오. 하지만 상대는 일을 모두 처리했기 때문에 단지 도망만 간다면 추적하는데 꽤 오랜 시각이 걸릴 수 있으니 문제요.”

구양휘는 난감했다. 이미 이 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된 데다가 또 다시 추적한다면 오늘 안으로 장안에 도착할지 미지수다. 구양휘는 일단 초혼령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같아서는 이들이 누구인지 면상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초혼령의 일이 우선이다.

“일단 포기하지. 장안으로 가세나.”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또한 마차를 타고 간 일행도 궁금했다. 그들의 능력으로 보아 쉽게 당할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상대는 의외로 경험이 부족한 그들이 대적하기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비상연락이 없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들은 전 속력으로 장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다치셨나요?”

양만화를 맞아 주는 사람은 냉약빙이었다. 양만화는 천잠보의를 입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사내의 무형기공에 옆구리를 맞은 후부터 몸움직임이 현저하게 둔해지고 정신이 혼미해 지는 가운데, 피를 몇 모금 토해낸 뒤에야 겨우 이 밀실에 도착했다.

“아내는…?”

그는 제일 먼저 아내부터 물었다. 그가 지시한 것은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약빙만 있을 뿐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님은… 소윤(蘇允)이란 사람과….”

“뭐… 누구라고…?”

“과거에 정혼자였다고… 하는데… 그 사내가 오자… 둘이 같이 간다고….”

냉약빙은 말을 하기가 어려운지 말끝을 흐린다.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양만화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소윤 그놈을 말하는 것이다.

“소가… 그 놈… 그 놈이 살아 있었나…? 헌데 어떻게 그녀와….”

머리가 혼란스럽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는 한켠에 놓인 의자에 몸을 실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저히 추측할 수도 없다. 어떻게 그 놈이 나타났는지. 왜 자신의 아내가 따라갔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쳐 죽일 년놈들…!”

이제는 분노다. 머리가 터질 듯한 분노가 타올랐다. 그렇게 사랑한 사람이오,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었건만 아직도 그놈을 잊지 못했단 말인가? 하필 이런 시기에 그런 놈과 같이 떠났단 말인가?

(나중에 모두 쳐 죽이리라…)

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초혼령주로 보이는 그 사내는 너무 강했다. 자신이 만에 하나 있을지 몰라 만들어둔 지하 통로와 석실. 폭약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이곳이지만 그 사내는 이곳까지도 모두 부셔버리며 곧 들이닥칠 것 같았다.

“약빙… 가자…”

그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여기를 벗어나 자신이 마련한 안전지대로 일단 가야한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곳. 그곳에 가서 쉬어도 늦지 않다.

“대인… 이년 전 구입한 연화대(蓮花臺)는 어디 있지요?”
“저쪽 서가 두 번째 서책 뒤에… 헌데 그건 왜…?”

그는 무심코 대답하다말고 냉약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이것저것 찾고 있었다. 그녀는 두 번째 서가에 가 책을 뽑아냈다. 철컥소리와 함께 서랍이 튀어 나왔다.

“가져가야 하니까요.”

그녀는 양만화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저렇게 웃는 모습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도 차가웠다. 하지만 지금의 미소는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매우 만족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건 뭐하러 가져가… 어차피 나중에….”

양만화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축 처졌고, 나른했다. 왜 그런지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기 어려웠고 귀찮았다.

“호…오… 아름답군요. 이 귀한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요.”

그녀는 서랍에서 꺼낸 연화대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들며 감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기는 손바닥 보다 약간 큰 것 같지만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연화대는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진 연꽃모양이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약빙…!”

양만화는 그녀를 부르다말고 말을 멈췄다. 연화대를 서가에 올려두고 돌아선 그녀의 눈빛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차가운 빛이었다. 얼음의 꽃이라고 자신이 불렀던 냉약빙과 정말 맞는 눈빛이었다.

“시간은 많아… 양돼지…!”

그녀는 빙기 서린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돌연한 변화였다.

“네… 네 년이 감히….”

어이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다소곳하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왔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돼지라 부른 것이다. 양만화는 몸을 일으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치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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