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한 바가지 사랑을 퍼주는 마중물이어야 했는데

임의진 목사의 시집 <사랑>을 읽고서

등록 2004.12.06 14:11수정 2004.12.0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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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상에서 가질 수 있었던 시간 중에
꽤 많은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기차에서 잠이 들었고
기차에서 책을 보았으며
기차에서 예언자를 만났다
그대를 그리워했다

어디론가 우리는 떠나야 한다
다시 역 앞에 나와 있다
우리에게 쥐어진 돈은 그저 여비일 뿐이다
앞으로 그대는 재산이라 부르지 말고
여비라고 불러야 한다

(10쪽, 「기차여행」중에서)

땅별 여행자요, 방랑 시인이요, 또 음악가요, 화가이기도 한 목사 임의진이 멋진 시집 한 권을 펴냈다. 지구별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들을 담아 멋지고 정갈스럽게 쓴 <사랑>이란 시집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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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겉그림입니다.

전남 강진 땅 남녘 교회에서 한 뙈기 텃밭을 일구며 할머니들과 오순도순 살아왔던 그는 어떤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이곳저곳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는 그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나는 비겁하였다. 마중물로 내려갔어야 했는데, 밑바닥을 보았어야 했는데, 잠깐 눈속임으로 고개나 살짝 수그린 것이 고작이지 않았던가."(15쪽)

누군가에게 한 바가지 사랑을 퍼주는 마중물이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는 걸까. 목사로서 하늘 뜻을 따르고 또 하늘 아래 땅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줘야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까. 그래서 스스로 뉘우치는 걸까.

그래도 그는 사랑이 어떤지, 사랑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빈 하늘에 그려내는 메아리 같은 그림이 아니라 땅 위에 살아가는 살가운 삶을 담아내는 그릇 같은 까닭에서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그는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욕심이 있다면 당신이 되는 것
내가 없어지고 당신이 내 전부가 되는 것
어떻게 하여야 합일을 이룰 수 있을까
양편의 뜻이 만나는 아우라지
진실이란 진실은 모두 당신에게
쌓아두고 싶다 생애의 모든 모래로
성을 쌓아서 그곳에 같이 살게 하고 싶다

(100쪽, 「합일의 꿈」중에서)

스스로를 없애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그. 그저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없으면 그만으로 아는 목사 임의진. 그래서 그는 그곳 남녘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요 또 아들로서 그지없는 사랑과 기쁨을 나눠 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버터 팝콘이 아니라 심심한 옥수수 튀밥을
한 봉지씩 들고 하느님은 밖에서 검은 장막으로
극장 구석구석 빛 구멍을 막아 주신다
영화가 끝나면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는 할매들이
촌평을 한마디씩 날린다 성탄 특집으로 본 빠졸리니의
《마태복음》, 할매들이 감탄사 대신 울화통을 터트리신다
배우들에게 한국말 좀 갈쳐서 찍으라고
죽은 빠졸리니에게 특별히 당부 말씀을 전하란다
다음번엔 야시시한 걸로다가 틀어 달란다
영화가 어디 보잘 것이 없단다

(234쪽, 「시네마 천국」중에서)

그런 이 시집에는 2003년 여름 먼 길을 떠난 무등산 중심사 일철 스님을 기리며 썼던 '달팽이 집'이란 시도 있고, 또 제주 서귀포에서 조촐하게 살아가는 이중섭 화가를 그리며 썼던 '이중섭 씨 단칸살이'란 시도 있다. 또 해외여행 길에 섰던 '야간비행사'와 '그리운 것들은 발이 달렸다'라는 시들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이 그려내고 있는 맛과 멋은 무엇보다도 '남녘 지기'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과 오순도순 동네 분들과 살아왔던 정겨운 이야기가 아니겠나 싶다. 그 대표작을 들라면 '어쩌다 하는 기도'와 '시네마 천국' 같은 시가 아니겠나 싶은데, 그 시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도 지고 또 참 사랑이 뭔지를 하나하나 일깨워 주고 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예배를 본다
일요일아침 11시가 되면 먼길을 걸어서
차를 달려 찾아온 친구들에게
복사한 주보를 한 장 씩 나누어 주고
읽기 쉬운 공동번역성서로 몇 줄 말씀을 같이 읽고
기타와 풍금을 켜서 노래도 부른다
입당송 영광송 찬송가도 부르고
김지하 시인의 주여 이제는 여기에도
부르고, 그러면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주님이 계신다
새벽예배도 없고 저녁예배도 없다
목사라는 인간이 엄청 게으른 탓이기도 하거니와
나머저, 우리마저 예배를 너무 자주 보면 그 분이
귀찮아하실 것 같아서
너무 기도를 자주하면
아이고 귀찮아 우리 소원을 들어 주실까 염려되어
내 한마디 두 마디 소원 하나 둘 그분도 귀하게
여겼으면 좋을 것 같아서

(251쪽, 「어쩌다 하는 기도」전문)

육 년 넘게 그곳 남녘 교회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벗이 되어 살아왔던 그. 때론 그 분들의 아들이 되어 심부름도 곧잘 해드리고, 또 그들과 함께 막걸리도 마시며 똑같은 농부로 살아 왔던 그.

그런 그가 얼마 전엔 그곳 남녘 교회에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까닭이 뭘까. 아마도 제도권 교회를 뛰어넘어 참다운 자유혼을 찾아 삶의 흔적들 여러 갈래를 그려 내고자 함이 아니겠나 싶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혼을 찾아서, 더 많은 사랑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사랑 - 지구별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

임의진 지음,
샘터사, 2004

이 책의 다른 기사

"그리운 것들은 발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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