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오천원도 남겠네"

일곱살 유치원생 서해성의 목포 여행기

등록 2004.12.10 08:07수정 2004.12.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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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4년 12월 7일 유달산에서 기념사진

2004년 12월 7일 유달산에서 기념사진 ⓒ 서정일

일곱 살 유치원생 서해성, 그가 오천원으로 할 수 있는 여행은 어떤 것일까? 돈이란 개념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나이지만 손에 쥐어진 오천원은 난생 처음 받아본 큰 돈임엔 틀림없다. "열차 타고 싶어요" "박물관에 가고 싶어요" 해성이의 바람은 그 두 가지. 하지만 우린 산행 하나를 추가했다.

7일 오전 7시 40분. 순천역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우리를 맞이했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새벽은 늘 약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하지만 따뜻한 맞이방 한 구석엔 고개를 푹 숙인 채 꿈나라를 헤매는 이도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대는 변했지만 기차역의 새벽 풍경은 똑같다.


'통근열차'. 그 이름도 생소하다. 예전에 역마다 섰던 완행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까? 목포까지 서른 한 개의 역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꼬박 꼬박 도장을 찍는 열차.

해성이와 동생 유정이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무임승차다. 그들에게 돈 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차비를 벌었다고 좋아하면서 오천원을 손에 들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는 해성.

a 오천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중인 해성

오천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중인 해성 ⓒ 서정일

4시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어린 해성이에게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걸 참기엔 너무나 긴 시간. "왜 매점 아저씨가 왔다 갔다 안 해요?" 큰 맘 먹고 끄집어 낸 말이다. 아마도 오천원을 쓰겠다는 결심을 한 모양.

하지만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통근열차엔 해성이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매점 아저씨는 없다고 한다. 표정엔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다. 하지만 입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우리는 가방에서 아침에 준비한 간식을 내 놓았다. 그제야 표정이 약간 풀린다.

a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있는 유달산 등산로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있는 유달산 등산로 ⓒ 서정일

"엄마, 여기 와 보세요 꽃이 피었어요!" 개나리였다. 겨울이라 할 수 있는 12월 초순 유달산에 개나리가 피어 있을 줄이야. 반갑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한참을 바라보다 정상을 향했다.


잘 정돈된 공원 같은 산 유달산.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은 이름에 걸맞은 일등바위. 하지만 산 정상의 높이는 얼마인지 알면 웃을지도 모를 227m. 아이들과 산책 겸 운동 겸 오르면 참 좋은 산이다. 하지만 밋밋한 산은 아니다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a 목포에서 먹어야 할 음식, 낙지

목포에서 먹어야 할 음식, 낙지 ⓒ 서정일

너희가 낙지 맛을 알어? 목포 하면 낙지, 낙지는 역시 목포다. 산행을 군소리 없이 마친 해성이와 유정이가 자랑스러워 한턱 쏜다고 데려간 곳은 낙지전문점.


가끔 먹어보긴 했어도 본 고장 맛을 제대로 봐 보라는 뜻에서 푸짐하게 한 상 차렸다. 물론 운전에서 해방된 나와 아내는 낙지에 곁들여 소주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음료수 한 잔 할래?" 우리끼리만 마시는 게 미안해서 넌지시 물어보니 해성이는 호주머니에서 돈만 만지작만지작 한다. 여느 때 같으면 한 병을 주문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꾹 참고 모른 체 해 본다. 이번 여행을 통해 뭔가 느껴볼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은 욕심에 두번 다시 물어보지 않고 식사를 마감했다.

a 부둣가를 걸으며 좋아하는 해성과 유정

부둣가를 걸으며 좋아하는 해성과 유정 ⓒ 서정일

해성이와 유정이가 항구를 보고 이렇게 큰 배를 구경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 태어나 순천으로 온 게 얼마 되지 않았고 항구에 데리고 가 본 기억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지 선착장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해성이와 유정이. 바라보고 있자니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에게 여행다운 여행 한번 없었음에 미안한 생각이 밀려온다.

a 입장료가 공짜라며 좋아하는 해성

입장료가 공짜라며 좋아하는 해성 ⓒ 서정일

"엄마, 여기 해양전시관도 공짜야!" 팔짝 팔짝 뛴다. 지금껏 한푼도 쓰지 않은 해성이. 유치원생이 공짜라는 특혜를 유감없이 누리고 있다. 예전엔 목포가 유달산을 빼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리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a 전시관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시관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 서정일

예술의 고장답게 글 그림 전시장이 많고 특히 자연사 박물관과 해양유물 전시관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하나 하나 꼼꼼히 살피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너무나 아쉽고 짧은 목포여행.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a 박물관에선 하나 하나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박물관에선 하나 하나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 서정일

20여분 시간이 남은 기차역 맞이방, 아까부터 자판기 옆을 연신 왔다 갔다 하는 해성이, 엄마보고 1000원짜리로 바꿔달라고 하더니 음료수 두 병을 산다. 동생과 먹으려고 1000원을 쓴 것이다.

"차비 없으면 어떻게 집에 가려고?" 하고 다그치니 배시시 웃으면서 "공짜잖아요" 하고 대답한다. 큰 실수를 저지른 셈. 아침엔 통근열차를 탔지만 갈 때는 무궁화호를 타야 한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할 수 없이 선택한 것. 그런데 문제는 좌석배정이 확실한 무궁화호는 할 수 없이 아이들 표도 끊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설명하면서 "너희들은 이제 돈이 모자라니 집에 갈 수 없어"라고 하니 울음을 터트린다.

a 결국 음료수 사 먹기 위해 1000원을 쓰고 마는 해성

결국 음료수 사 먹기 위해 1000원을 쓰고 마는 해성 ⓒ 서정일

달래고 달래서 열차에 태운 지 10여분, 곧바로 잠에 골아 떨어진다. 오늘 여정이 많이 힘든 듯. 자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하루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너무나 소중한 여행이었음을 깨달았다.

여행하면 늘 자가용이었던 것이 대중교통으로 바뀌었고, 아이들에게 미리 돈을 주면서 계획을 세워보게 했고, 산행을 하면서 운동을,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공부를…. 참 소중한 하루였다.

"엄마한테 해성이가 1800원 빚 진 거야. 나중에 꼭 갚아야 한다." 순천역에 내려 다시 다짐을 주고받는 모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음엔 어디를 또 데리고 가볼까" 하고 생각했다. 전에 없던 생각이다. 아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려고 계획한 여행. 아이들의 변한 모습보다 더 많이 변한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a 순천역에 도착해서 여행 결산을 하고 있는 모습

순천역에 도착해서 여행 결산을 하고 있는 모습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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