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남소연
김일성을 면담하러 가는 과정에서 든 그의 상념이다. 해서 물었다. 책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참 소심한 운동가' 아니면 '자기 검열이 치열한 운동가'로 생각했다고,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만날 수도 있지 않으냐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과는 엄연히 다르죠. 저는 분명히 유럽운동단체의 총무였습니다. 운동을 안 할 거면 몰라도 운동을 계속하려면 남쪽 운동과 연계해야 하는데, 그래 놓고 무슨 명분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조작된 유럽 총책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확인시켜 주는 물증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운동권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운동의 방향이 한쪽으로 기우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또 범민족대회의 결과물인 범민련 결성 과정에서 이견이 노출된다.
"통일운동단체인 범민련이 결성되면서 부문운동의 협의체인 유럽민협이 범민련 안으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해체하라는 유무형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의 공안당국이 이적단체로 낙인 찍은 유럽민협은 청산 절차를 밟게 되는데 저는 그 일을 계기로 사실상 운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영구 귀향하여 한국에서 살고 싶다
그는 지금은 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매년 한번씩 열리는, 독일에서는 꽤 큰 행사인 광주를 기념하는 '5월 민중제'에 가끔 참석하는 것이 가장 활발한 활동이다.
행사 참석을 알리는 초청장이 오긴 하지만 이라크 파병 반대 서명이나 옛 유럽민협 회원들이 주축이 된 한민족유럽연대 결성할 때 발기인에 고작 이름 정도 넣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라디칼'과 '엑스트림'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우리 사회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극언과 막말이 오가는 우리사회의 갈등은 언젠가부터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온 '엑스트림'(극단적) 경향 때문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극단적 방법이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젠 아류와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찾으려는 '라디칼', 이를 테면 근본주의인데, 사실 근본주의 원래의 뜻은 극우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었죠. 여하튼 라디칼로 세상과 사물을 대하되 관용을 가지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간다면 어지러운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마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그만 둔 후 그는 때로는 실업수당을 받으며, 때로는 6년간 직업적(사실 천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으로 가톨릭 산하 카리타스 사회복지회에서 병든 노인들의 수발을 드는 일을 하며, 또 때로는 베를린 성당의 총무도 되고, 마침 공석중인 사무장일도 떠맡으며 운동할 때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신앙심은 아주 신실해 보였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 산간 지방의 알트퇴팅 성당 안에 있는 작은 경당 벽면 동판에 새겨져 있다는 "천주의 성모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18년 동안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많은 시련과 실망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로젠하임, 1939.5.27" 라는 이 글귀가 왠지 자신을 두고 한 말 같아서 자신의 수첩에 적어 넣고 다닐 정도라니까 미루어 짐작하리라.
그는 영구 귀국하여 이곳 한국 땅에서 살고 싶어 한다. 독일의 네오나치스트에게 몸으로 대항하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대학생 아들이나 지금의 간호사 아내, 친정이 전남 벌교의 들몰 마을이라서 이름 붙여진 들몰댁, 간암 판정을 받은 전 남편을 무릎에 안은 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7년이나 혼자 지내다 그와 재혼한 그녀가 극구 반대하다 이젠 마지못해 동의해 줘(?) 그래서 영구 귀국의 길을 모색한다.
"집도 절도 없으니 어디 한적한 산자락에 빌붙어서 산장이나 클래식 카페를 하며 둥지를 틀고 싶지만 아마 그건 헛된 꿈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