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북핵 '정치적 타협' 모색하나

[심층진단] 우라늄 농축 문제 입장변화 움직임 주목

등록 2004.12.13 11:34수정 2004.12.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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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2차 북핵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우라늄 농축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미묘한 입장 변화가 감지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핵무기 제조용으로 우라늄 농축을 시도해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폐기할 것을 확약해야 본격적인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북한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해온 것이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의혹 제기를 일축하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도 없다"며 맞서왔다. '불신의 게임'으로까지 악화된 이 문제는 북핵 문제 해결의 '난제 중의 난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이 프로그램이 핵무기 제조용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철회했다"고 10일 보도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교토통신도 11일 미국 소식통을 인용해, "만약 북한이 평화적 목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보유를 인정하고 포기를 확약하면, 미국은 이를 '완전한 핵 폐기'에 대한 북한의 동의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로이터통신의 인터뷰에 응한 미국 관리들은 이러한 입장을 12월 초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와의 접촉에서 전했으나, 북한이 이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외신 보도에 앞서 필자가 지난 5월 초 만난 미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 목적, 그리고 수준은 불분명하다. 북한에게 핵무기 제조용인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시인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R&D) 수준이라는 가정 하에 북한과 논의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고려해볼 수 있다. 다만 북한이 그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불신의 게임', 정치적 체면 살리기

로이터통신과 교도통신의 보도처럼, 만약 부시 행정부가 우라늄 농축 문제에 대해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후퇴해 유연한 입장으로 전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 대북한 비타협주의에서 대북 협상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실체가 불분명한 우라늄 농축 문제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대북한 비타협주의를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지난 3차 6자회담에서의 대북 제안이 "교섭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부시 행정부가 '낮은 수준'의 정치적 체면 살리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북한에게 항복을 받는 방식에서 자신의 정치적 체면 훼손을 최소화하는 정치적 절충점을 모색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해왔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에 대해 미국 안팎에서는 끊임없이 반론이 제기되어왔다. 즉, 부시 행정부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정확한 증거도 없이 북한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원심분리기
원심분리기미국과학자협회
더구나 최근에는 부시 행정부가 제시한 유력한 정황 증거에 대해서 파키스탄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부인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A.Q 칸 박사가 북한에게 원심분리기 원형과 설계도를 제공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또한 "IAEA가 북한이 리비아에 우라늄 헥사플루로이데(UF6)를 수출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는 정보를 <뉴욕타임스>에 흘리기도 했지만, IAEA는 이와 같은 보도를 부인했다.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정치적 동맹국인 파키스탄과 유일한 국제감시기구인 IAEA마저도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안 그래도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 조작으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부시 행정부로서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문제마저도 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한 '과잉 대응'으로 판명된다면, 더욱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핵무기용'이라는 단정에서 한발 물러나 '평화적 이용'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은, 그나마 정치적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북한이 우라늄 농축 기술 보유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항복 요구'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물론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문제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아직 2기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입장을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대외적으로 유연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북한을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문제는 '무조건적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추구할 사안이 아닐뿐더러, 부시 행정부 일각에서도 정치적 타협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가 2기 때에도 실체가 불분명한 우라늄 농축 문제에 집착하면서 정작 중요한 플루토늄 문제를 방치할 경우 미국 안팎의 비판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공간은 예전보다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 문제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면서 양측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에게도 계속 부인만 할 것이 아니라, 의혹을 해소할 의사가 있다는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노력도 중요하다.

실제로 우라늄 농축 기술은 근본적으로 '이중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법은 더욱 현실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라늄 235를 90% 이상으로 농축하면 핵무기 제조로 사용할 수 있고, 저농축 우라늄은 경수로의 원료나 농업용, 의학용으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남한이 향후 핵연료 제조 기술의 확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R&D 수준에서 우라늄 농축 실험을 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북한이 향후 경수로에 사용될 핵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우라늄 농축 기술 확보를 시도했다고 정리하면 북핵 문제는 의외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LA 발언'을 시발로 3주간의 해외 순방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불확실성이 고조되던 한반도 정세를 안정화시키고 한국 주도의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총론 수준의 해법을 밝힌 것이라면, 이제는 각론을 가다듬어야 할 차례이다.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북미간의 입장차이를 보면 그 간극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2차 핵위기'의 시발점인 우라늄 농축 문제에 대한 절묘한 해법 모색은 한국의 주도적 역할에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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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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