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쌀이 떨어졌다"

이오덕, 박완서 외 11명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

등록 2004.12.14 13:52수정 2004.12.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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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오덕 외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 마산문화문고

이오덕 외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 마산문화문고 ⓒ 한길사

연말연시가 다가온다. 망년회다, 동창회 모임이다, 후원의 밤이다, 누구누구 결혼식이다, 부르는 곳도 많고 반드시 들러야 할 곳도 점점 많아진다. 날씨는 자꾸 더 추워지고 주머니에 든 지갑은 구멍이 뚫린 타이어처럼 자꾸 얇아진다. 지갑이 얇아질수록 배도 자주 고파 오고 먹고 싶은 것도 눈에 자주 띈다.

춥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마음이 더 춥다. 문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스한 밥 한 그릇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반찬 몇 없어도 그런 밥 한 그릇을 지글지글 끓는 방구들에 앉아 입이 미어터지게 먹고 싶다. 입 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숭늉 한 그릇을 후루룩 후루룩 마시며 이 세상살이의 서러움을 한꺼번에 쫓아내고 싶다.


이오덕, 박완서, 최일남, 공선옥, 홍승우 등이 쓴, 맛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이 담겨 있는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한길사)은 이런 때 읽을 볼 만한 책이다. '나는 먹는다, 그리고 추억한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이름만 들어도 금세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사람 13명이 썼다.

시사만화가 고경일, 작가 공선옥, 박완서, 성석제, 신경숙, 최일남, 시인 김갑수, 건축가 김진애, 지난 해 이 세상을 떠난 아동문학가 이오덕, 화가 정은미,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 장용규 외국어대 교수, 만화가 홍승우가 그들이다.

하지만 요즈음 나온 새 책은 아니다. 지난 2월 23일에 제1판 제1쇄를 찍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근데 왜 새삼 이 책을 꺼내 이야기하는가. 이 책 속에는 얼어 붙은 몸을 오뎅 국물처럼 따스하게 데워 주는 오래 묵은 추억이 구수한 된장처럼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는 힘겨운 보릿고개를 이겨낸 어머니의 손맛이 짭짤달콤한 간장처럼 촘촘촘 배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못생긴 여자를 호박 같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반들반들 윤기나고 허리가 잘룩한 애호박을 보면 뭐 해 먹겠다는 예정 없이도 무조건 사고 본다….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들 무렵의 밥 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다만 예전보다 간사스러워진 혀끝을 위해 된장을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셔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 없다. - 27쪽 '강된장과 호박잎쌈' 몇 토막


작가 박완서는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며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고 말한다. 음식 맛이란 것이 잠시 혀 끝을 희롱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두고 두고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는 그 말이다.


박완서는 "이 세상엔 맛있게 만든 음식과 맛없게 만든 음식이 있을 뿐, 인간의 몸이 몇 만 년에 걸쳐 시험해 보고 먹을 만하다고 판단한 자연의 산물 중 맛없는 것은 없다"고 꼬집는다. 이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며 어설픈 사람의 손맛을 맵게 꼬집는다.

놋쇠 대접에 담긴 전주 비빔밥은 우선 색채가 아름답다. 선홍빛 육회와 치자나무 열매로 물들인 샛노란 청포묵에 슬쩍 데친 미나리 빛깔, 그리고 까만 김가루의 대비가 그만이다. 그 밑을 살찐 콩나물이 받치고 있다. 청포묵을 써는 방법도 중요하다. 길이는 콩나물 키 정도라야 알맞고 굵기는 이팔청춘 처녀의 손가락 수준이 제격이다.

요것들을 주축으로 하여 그 음식점이 자랑하는 고명이나 양념을 몇 가지 넣고 빼는 비법의 자유 재량이야 마다하지 않되 반숙란이나 날계란 등속을 곁들이는 것은 질색이다. 전래의 격식이 아닐 뿐더러,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45쪽 "전주 해장국과 비빔밥" 몇 토막


작가 최일남은 "비빔밥과 콩나물 해장국의 고장에서 태어난 내 '식복의 행운'은 따라서 더 들먹일 것이 없다"며 고향 전주의 음식을 손꼽는다. 하지만 고향의 콩나물 해장국이 옛맛을 차츰 잃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한다. 요즈음 콩나물 해장국이 지나치게 뜨겁고, 양도 많고, 맵다는 것이다.

작가 신경숙은 "엄마가 밥그릇 위에 보리밥을 퍼서 놓아 주면 누군가는 상추 위에 깻잎을 얹고 무 잎사귀를 또 얹고 보리밥을 얹고 쌈장을 얹어 오무려 볼이 미어지게 쌈을 해 먹고 또 누군가는 보리밥에 찬물을 말아 그저 담담히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던 어린 시절의 그 보리밥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때가 초여름, 오후 세 시쯤 되었나. 아무튼 아침부터 돌아다녀서 그랬는지 참을 수 없을 만치 배가 고팠다. 허기가 들어 온몸에 땀이 나더니 착 까부라져서 길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점심 한 끼쯤 안 먹었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도 아침도 못 먹고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두 사람을 따라 어느 주막(이라고 기억하는데, 농삿집이었는지도 모른다)에 들어갔고, 한참 뒤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이 봉두로 담긴 밥상을 받게 되었다. 반찬이야 물론 푸성귀이고 된장이었을 테지만, 그까짓 반찬이 무슨 소용인가. 내 그토록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다.

- 147~8쪽,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몇 토막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은 그때 자신을 구해준 그 밥 한 그릇과 밥맛을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잊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멀쩡한데 밥맛이 없다는 사람, 그래서 밥을 먹다가 예사로 남겨서 버리는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또한 그런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고 근사한 글을 써도 믿지 않는다.

a 만화가 홍승우는 "'먹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직장인의 슬픔을 그린다

만화가 홍승우는 "'먹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직장인의 슬픔을 그린다 ⓒ 한길사

작가 성석제는 "경기도 장호원에서 충청도 충주로 가는 38번 국도를 따라" 줄지어 선 묵밥을 들먹인다. 그 묵밥은 "할머니가 자신이 묵밥을 만든 원조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악착같이 원조로 추천"하고 싶은 묵밥이다. 작가 공선옥은 "아홉살 겨울에 우리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밥이 공포가 아니라 밥때가 공포였다"며 "가난이 공포가 아니라 배고픔이 공포"였다고 고백한다.

그밖에도 만화가 홍승우의 "음식에 대한 열가지 공상", 화가 정은미의 "초콜릿 모녀", 시사만화가 고경일의 "나베에선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건축가 김진애의 "요리, 요리를 축복하라", 이대 교수 주철환의 "바나나를 추억하며", 시인 김갑수의 "에스프레소, 그리고 혼자 가는 먼 길", 외대 교수 장용규의 "줄루는 아무 거나 먹지 않아"가 읽은 이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

이오덕 박완서 외 11명이 쓴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은 우리들이 끼니 때마다 먹고 남기는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밥은 목숨이고 모든 사람이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요즈음도 "우리 사람 사회는 먹지 못해서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오덕 선생의 말씀이 회초리처럼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지음,
한길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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