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77회

등록 2004.12.15 07:24수정 2004.12.1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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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관왕묘(關王廟)

관왕묘(關王廟)는 촉한(蜀漢)의 명장이었던 관우(關羽)를 기리는 사당이다.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고 무묘(武廟)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은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관성제군의 고덕(高德)으로 재물을 불러 모으고 악귀를 쫒을 수 있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다보니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당이 관왕묘다.


장안 북쪽에 당(唐)·송(宋)나라의 고비(古碑)가 많이 보존되어 있는 비림(碑林)의 끝에 있는 관제묘는 이미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 되었는지 매우 낡아 있었다. 벽이 이곳저곳 숭숭 뚫려있고 지붕 역시 비가 스며들었는지 여기저기에는 바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관왕묘 안에 모여 있었다.

관성제군상(關聖帝君像)의 좌측 앞에는 일곱 명의 남녀가 모여 앉아 무언가 맛있게 먹고 있었다. 불빛에 번지르르하게 윤기가 반짝이는 갈색모피를 깔고 앉아 있는 이십대 전후로 보이는 소녀는 화려한 녹의(綠衣)를 입고 머리에는 금으로 된 장식을 꽂은 청초한 미녀였다.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그녀 옆에는 홍의를 입은 삼십대 중반의 여인과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중년여인은 사내라면 눈이 번쩍 뜨일만한 요염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착 달라붙은 홍의를 입고 있어 몸매의 굴곡을 뚜렷하게 보이며 묘한 색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홍의여인과 바싹 몸을 붙이고 있는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과 그 맞은편에 오십대 전후로 보이는 두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고, 남은 한명은 특이하게도 금색가사를 걸친 라마승(喇嘛僧)으로 보이는 노승이 있었는데 화기(和氣)가 충만하고 눈빛이 고요해 고승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 야심한 시각에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일곱 명의 남녀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더욱 기이한 일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구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큰 솥이었다. 다리가 세 개 달려있어 마치 향로를 크게 만든 것 같았는데 그 속에서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닭죽이 끓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한가지 기이한 일은 그들과 일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제단(祭壇)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흑의인이었다. 그의 흑의는 눈에 보일 정도로 피에 절어 있고 바닥에도 피가 홍건하게 괴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 외에도 기이한 일행과 삼장 정도 떨어진 구석에는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촌노(村老)와 삼십대 시골 아낙 차림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촌노의 며느리쯤으로 보였다. 그들은 다른 인물들과 눈을 마주치기 싫은 듯 한쪽 귀퉁이에서 몸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쪽 구석에 낡은 거적을 덮고 누워있는 거지행색의 노인이 있었는데 벌써 잠이 들었는지 낮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하게 이러한 관제묘와 어울릴 것 같은 인물이었다.

나무수저를 아쉬운 듯 그릇에 놓은 홍의여인이 혀로 입술을 빨더니 옆에 붙어 앉아있는 청년을 보면서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신은 점점 음식솜씨가 좋아지는군요. 아마 이렇게 맛있는 닭죽은 장안루(長安樓)에 가서도 맛보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말투나 조그만 행동에도 색기가 넘쳐흘렀다. 잠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동작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욕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칭찬에 청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당신이 맛있다고 하는걸 보니 나는 정말 기분이 좋구려. 내가 당신의 사랑에 보답해 줄 수 있는 것이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 밖에 없는데 당신이 맛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같은 아내를 얻어 행복하다고 느끼오.”

“소첩 역시 언제나 가가께서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감사해요.”

두 사람만 있다 해도 하기 어려운 낮 간지러운 말들이었으나 주위의 사람들은 으레 그런 듯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여인의 나이가 청년보다 언뜻 보아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도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홍의여인은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죽을 먹고 있는 오십대 인물 중 바싹 마르고 자줏빛 안색을 띠고 있는 오십대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특이하게도 씹을 것도 없는 죽을 한 수저씩 떠서 천천히 씹어 먹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그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형(邢)오라버니. 정말로 이 죽은 맛있지 않은가요? 어디서 이런 죽을 맛볼 수 있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애교 어린 말투여서 그가 동조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씹은 죽을 삼키고는 수저를 놓고 고개를 끄떡였다.

“이 형모(邢某)는 먹을 수 있는 것을 가리지 않소. 또한 음식을 즐길 줄도 모르오. 하지만 남형(南兄)이 끓인 이 죽은 정말 특이할 정도로 맛이 있소.”

그의 그런 칭찬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음식에 대해 칭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인물이 말을 받았다.

“흐흐.. 자오공(紫蜈蚣) 두 마리와 칠보사(七步蛇)를 넣고 끓인 닭죽이니 맛이 없을 리가 있겠소? 더구나 남형의 요리솜씨야 왠만한 숙수들도 혀를 내두르는 솜씨가 아니오?”

말을 한 사내는 청의(靑衣)를 입고 특이하게도 두 눈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외형으로 보아 색목인(色目人)은 전혀 아니었다. 더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피부나 머리카락도 은은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에 청년은 만면 가득 웃음을 띠우며 손을 내저었다.

“허...두 분께서는 이 남모(南某)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구려. 여러분들이 그리 칭찬을 해주시니 본 공자가 요리를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다만 금존불(金尊佛)께서 드시지 못하시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소.”

말과 함께 그는 시선을 돌려 금색가사를 걸친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라마승은 불타와 같은 자애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합장을 했다.

“허허.... 남공자의 말씀만이라도 고맙소. 본불(本佛) 역시 냄새만으로도 능히 이 죽은 어디를 가도 맛볼 수 없는 진귀한 것임을 알 수 있소. 허나 수행(修行)을 위해 금식(禁食)하는 관계로 먹지 않은 것이니 개의치 마시오.”

“정말 이상하군요.”

금존불이라 불린 라마승의 말에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홍의여인이 좌중을 보며 한 말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청초한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상숙모(尙叔母)께서는 뭐가 그리 이상하다고 하시는지요?”

청초한 소녀의 목소리는 마치 쟁반 위에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청아했다. 이런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그녀는 보면 볼수록 신선한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호호... 금천불께서는 이미 출신입화(出神入火)의 경지에 오르신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뭐가 아쉬워 수행을 하시기 위해 금식을 하시고 계시냐는 말이지요. 소궁주(小宮主)는 이 일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허허...상부인께서 본불을 놀리시는구려. 수행이란 끝이 없어 육신(肉身)을 버릴 때 비로소 멈출 수 있는 것이오. 그래서 불가에서는 해탈(解脫)이 바로 고행의 끝이라고 하는 것이오.”

“소첩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헌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끼이--익---

낡은 관왕묘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 온 인물은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으로 몰려있고 뒤로 쓸어 넘긴 머리는 기이하게도 회색이어서 검붉은 피부와 더불어 기괴한 느낌을 들게 했다. 더구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눈은 쉴 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어 영락없이 쥐를 연상케했다.

이어 그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인물들은 두 명이었다. 사십대로 보이는 그들은 드러난 팔뚝이 마치 구리를 깎아 만든 듯 울퉁불퉁하여 힘깨나 쓰는 자들로 보였다. 헌데 기이한 것은 두 사람의 옷차림과 생김새가 똑같을 뿐 아니라 그들 어깨에 비스듬이 매여져 있는 낭아봉(狼牙棒)까지 똑같아서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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