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할아버지가 사랑에 빠졌대요"

책 속의 노년(80) : 노년을 담은 동화

등록 2004.12.17 04:00수정 2004.12.1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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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흔 일곱이신 친정어머니와 열두 살짜리 둘째 딸아이는 한 마디로 찰떡궁합 사이다. 갓 태어났을 때는 태열이 심해서 그랬는지 푹 자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는데다가 그저 울기만 해서 할머니 애를 태우더니, 지금은 매일 우리집에 오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늘 소곤소곤한다.

할머니가 반찬을 만들면 옆에 붙어 서서 심부름을 하면서 간단한 것을 직접 해보기도 하고, 할머니가 바느질을 할라치면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바늘에 실을 꿰어드리기도 하면서 자기도 덩달아 헝겊 조각을 꿰맨다. 요즘은 할머니랑 나가서 털실을 사온다, 코 만드는 것을 배운다, 한참 수선을 떨더니 아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목도리를 짠다면서 자나 깨나 뜨개질을 하느라 한눈팔 사이가 없다.


이러니 할머니도 둘째라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신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둘째에게 고민이 생겼다. 할머니 아닌 내게만 가끔 털어놓는 고민이다.

"엄마, 그런데 있잖아, 이담에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지?"

아이의 심각한 질문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늘 대답이 막히곤 한다. 그래서였을까? 물론 내가 노인복지를 직업으로 삼고 있기도 하지만, 아이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노년이 담긴 동화를 많이 골라주게 되었다.

그런데 열심히 읽고 난 아이는 빼놓지 않고 내게 그 책을 들고 온다. "엄마, 여기에 할머니도 나오고 할아버지도 나오니까 엄마 한 번 읽어봐!" 자기 딴에는 엄마의 일을 돕겠다는 배려이리라. 그래서 만나게 된 좋은 동화책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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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할아버지〉는 괴짜 할아버지이다. 일흔 다섯 연세에, 나이 들어 많이 줄어들었다는 키가 무려 189센티미터, 홀쭉한 얼굴에 턱에는 뾰족 수염이 나있다. 열 살짜리 남자아이 야콥의 외할아버지인 이 꺽다리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야콥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신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체면에 얽매이는 법이 없는 욘 할아버지가 야콥네 집에서 일 년 남짓 사시는 동안 식구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예전에 염색공이었던 실력을 되살려 야콥 엄마의 얼룩진 블라우스를 파랗게 물들여 놓기도 하고, 검정삼각팬티 차림으로 동네 수영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50대 후반인 마리안네 아줌마를 사랑하게 된 일이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할아버지께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연애가 불가능하리라고 삐딱하게 이야기하자 할아버지는 목에 핏줄을 세우며 외친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아직 백 사람에게 반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연애할 수 있다."

언제까지고 자신의 삶을 손수 꾸려갈 수 있을 것 같던 할아버지도 그러나 세월과 병의 공격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만다. 뇌졸중에 이은 치매 증상으로 온가족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들은 가족회의를 거쳐 끝까지 집에서 할아버지를 돌봐드린다. "너희들 곁에 있으니 좋구나…."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책 속의 욘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건강하고 거칠 것 없어 보이셨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실 수밖에 없게 된다. 야콥의 가족들은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리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며 쉬쉬하거나 '아이들은 몰라도 된다'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 힘으로 야콥의 엄마와 아빠, 누나 그리고 어린 야콥까지도 할아버지의 병상을 돌보고 지킬 수 있었다. 아무 말씀도 못하게 되신 할아버지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할아버지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가족의 마음을 느끼고 읽으실 수 있다는 믿음 또한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스스로 뒤로 물러나지 않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섬기고 돌봐드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보고 받아들이는 식구들. 우리가 나이 듦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 늙음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쩜 이렇게 별스럽지 않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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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보내기의 주인공은 작년에 아빠를 간암으로 잃은 열한 살 여자아이 민서. 아빠가 떠난 집안은 엄마의 한숨소리만 가득하고, 그런 엄마 마음속에는 아빠만 있고 민서는 없는 것 같아 서운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빠처럼 엄마도 잃어버릴까봐 겁이 난다.

민서와 엄마를 찾아주는 사람은 젊었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7층의 홀로 사시는 할머니뿐. 민서와 할머니는 슬픔과 우울의 늪에서 도무지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엄마를 건져 주기 위해 비밀 작전을 짠다. 민서의 작전은 엄마에게 동요 불러주기, 할머니의 작전은 민서 엄마랑 아파트 주변 빈터에 농사짓기였다. 작전 성공! 엄마는 드디어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고, 조금씩 웃음도 되찾게 된다.

할머니와 가까워지면서 민서는 할머니의 아픔도 알게 된다. 5년 전 역시 암으로 할아버지를 잃으신 할머니, 하나 뿐인 아들네 식구가 멀리 미국에 살고 있어서 할아버지 기일도 홀로 보내시는 할머니. 그래서 민서는 알게 된다. '사람들에겐 다 조금씩은 슬픔이 있구나….'

엄마만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도 엄마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것을 안 민서. 누군가를 제대로 떠나보내려면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다들 아파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 민서.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아빠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확인하는 민서.

책을 펴자마자 만난 민서는 아빠가 떠난 후 넋이 나간 엄마 옆에서 슬프고 외롭고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거리니 옆에 있던 아이가 한 마디 건넨다. "엄마, 너무 슬프지. 나도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엄마는 아빠 생각만 하면서 슬퍼하면 살기 싫을 것 같아."

각자의 아픔에 쩔쩔매던 모녀를 도와준 7층 할머니의 지혜는 달리 말할 것 없이 먼저 겪은 생생한 경험과 삶의 나이테가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사는 것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것 역시 나이 듦의 선물 아니겠는가.

민서 엄마와 민서는 이렇게 해서 아빠를 제대로 떠나보낸다. 슬픔과 아픔이야 어찌 없겠는가. 그래도 떠남을 받아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 아빠의 자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민서와 엄마에게는 이미 식구가 되어버린 7층 할머니가 계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아픔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 가슴 아프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두껍지 않은 동화책에는 죽음을 결코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추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미덕이 있다. 거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감싸 안는 노년의 넉넉함까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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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를 부는 할아버지>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어딘가 아픈 곳이 있고 그래서 많이 힘들다. 반 지하에 사는 영재는 다리가 없는 아이여서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는커녕 만나본 적도 없다. 아빠는 돌아가셨다.

영재 혼자 집에 놔두고 식당에 나가서 일하는 엄마.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영재마저 몸이 불편해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식당 앞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는 끝순 할매는 오래 전에 전쟁으로 남편과 아기들을 잃었다.

영재네 두 식구에게 방을 빌려준 이층집 할아버지. 고맙긴 하지만 워낙 무뚝뚝하고 인사도 받지 않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무서운 할아버지다. 영재는 할아버지가 방안 가득 만들어 놓은 나무 인형을 훔쳐보고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자신이 등 떠밀어 여행 보낸 아들, 며느리, 손녀가 사고로 모두 세상을 떠나는 커다란 아픔을 지니고 있었던 것. 끝순 할매와의 갈등과 신경전을 거쳐 할아버지는 서서히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게 되고, 영재도 특수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영재는 할아버지, 끝순 할매, 엄마, 영재, 그리고 고양이 식구들까지 모두 모두 함께 오래 살기를 기도한다.

때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을 쏟는 영재는 결코 마음까지 아픈 아이는 아니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유롭게 묘사돼 아쉬움이 좀 남기는 하지만, 장애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지나치게 무겁게 끌고 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턱없이 가볍게 만들지도 않는 작가의 솜씨가 은근하다.

동화 속에서 노년을 만나다보니 내게는 꿈이 하나 생겼다. 연령별, 세대별로 나누어 '노년이해 교육'을 하는 것이다. 노년준비야말로 어린아이 때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말이다. 노년은 머지않아 만나게 될 나의 얼굴이며, 우리들 생의 일부라는 것을 세대를 넘어 모두가 알게 될 때 비로소 노인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모두의 짐이 아니고 같이 있어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다. 동화는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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