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갑의 고집과 김기춘의 변신

국보법 처리에 대한 한나라당 보수강경파의 선택

등록 2004.12.16 18:16수정 2004.12.1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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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오전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법사위원장석을 점거한 채 법사위 전체회의를 막고 있다. 김용갑 의원이 법사위원장석에 앉아있고, 한나라당의원들이 두겹으로 위원장석을 둘러싼채 법사위 회의개회를 막고 있다.
12월 8일 오전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법사위원장석을 점거한 채 법사위 전체회의를 막고 있다. 김용갑 의원이 법사위원장석에 앉아있고, 한나라당의원들이 두겹으로 위원장석을 둘러싼채 법사위 회의개회를 막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9년 동안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겨우 8일 동안 투쟁하고 이런 식으로 자중지란 일어나면 어떡하나. 표결로 몰아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더이상 한나라당에서 내 역할이 없다!"

15일 밤늦은 시각까지 한나라당이 12시간 마라톤 의원총회를 벌이는 동안 김용갑 의원은 이 말을 던지고 회의장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저녁식사 후 속개된 의원총회에서 이날 제출된 국보법 개정초안을 바로 표결에 부쳐 당론으로 결정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김용갑 의원은 표결을 반대하며 항의표시로 퇴장했던 것.

이재오·권경석 의원 등이 따라나와 만류했지만, 김 의원은 "더 이상 한나라당에 내 역할이 없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이 의원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렇게 밀려서야 뭐가 되겠어"라고 분을 삭이지 못한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김 의원이 나가고 1시간 뒤, 결국 표결을 통해 당론확정은 박근혜 대표에게 일임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당론결정방법을 두고 벌인 표결에서 40:47으로 지도부 위임이 약간 앞섰던 것. 하지만 김 의원의 '퇴장'이 아니었다면 표결을 통해 '전향적' 개정안이 당론으로 바로 확정될 분위기였다.

김용갑 의원의 외침 "더 이상 한나라당에서 내 역할이 없다!"

지난 15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용갑 의원.
지난 15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용갑 의원.오마이뉴스 이종호
당 국가보안법개정안 준비특위(위원장 이규택)에서 이날 의총에 제출한 개정초안은 국가발전전략연구회-새정치수요모임의 절충안과 자유포럼안으로 압축됐다. 전자가 법안명을 국가안전보장법으로 고치고 정부참칭 표현을 삭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향적' 개정안이라면, 후자는 법안명칭과 정부참칭 조항에 손도 댈 수 없다는 소폭 개정안.

8시께 속개된 의원총회에서 자유포럼 소속의 안택수 의원의 반대토론이 있었으나 소장파 의원들이 나서 브레이크를 걸었고, 홍준표 의원이 '비밀투표로 당론을 결정하자'고 표결을 제의하면서 확실히 자유포럼쪽이 기우는 분위기였다.


이튿날 <오마이뉴스>와 만난 김용갑 의원은 "우리가 밀리더라, 안택수 의원이 나간 뒤에 그 뒤에 원희룡·이성권·홍준표 의원이 나와서 전향적 개정안으로 분위기를 몰고 가는데 안되겠다 싶었다"며 "그래서 내가 신상발언을 신청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김 의원은 "아마 내가 그렇게 뛰쳐나오지 않았으면 표결로 당론을 결정해 버렸을 거다"라며 "그런데 내가 나가버리니까 표결로 밀어부쳤다가는 당이 분열되고 큰일 나겠다 싶어 분위기가 확 바뀐 것 아니겠나"라고 자평했다.


사실 40:47이라는 근소한 차이의 표결결과는 박근혜 대표에게 보수강경파를 설득하라는 의원들의 암묵적인 메시지이기도 했다.

김 의원도 한나라당의 변화를 실감하는 듯했다. 김 의원은 "DJ 정부도 그렇게 국보법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막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나라당 내부가 바뀌었다"라며 한탄스러워했다. 김 의원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법사위장에서도 하룻밤 자고, 젊은 의원들은 텔레비전 찍히는 거 무서워하는데 내가 앞장섰더니 초선 의원들도 나서더라"고 말했다.

국보법 사수를 향한 초지일관
김 의원의 이 같은 국보법 사수를 위한 강경노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박근혜 대표가 지난 9월 현 개정초안과 같은 골자의 국보법 개정의사를 밝혔을 때 김 의원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본회의장에서 손수 제작한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 반대' 종이피켓을 들어 깜짝 1인 시위를 벌여 박 대표를 압박한 바 있다.

또한 그 다음 주에도 역시 5분 발언권을 얻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대통령과 여당은 정신을 차리고…"라고 말한 뒤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동료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쓰러져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의원직 사퇴로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김 의원은 지난 10월 박근혜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열린우리당의 안대로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전한 뒤 보좌진을 통해 대표 비서실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국보법 폐지 반대 행보였다.

하지만 '철통'같던 김 의원의 생각에도 조금의 지각변동은 있어 보인다. 자유포럼의 김기춘·안택수·이방호 의원이 '지도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표시한 것에 대해 동조하냐고 묻자, 김 의원은 "좀더 생각해 보겠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정 내용과 상관없이 박 대표의 결정을 따르겠냐는 질문을 재차 던졌지만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침묵했다.

국보법에 관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뭔가라는 질문에도 김 의원은 "아직 밝히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박 대표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아마 잘 결정해 줄 것이다"라고 말해, 기대를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또한 김 의원은 이날 의원총회장에서 "여당이 폐지를 철회하고 개정에 합의하기 전에는 당론을 내지 마라"고 주문한 것에 대해 "박 대표가 '약속한다'고 말했다"며 이 점에 대해서도 크게 안심하는 눈치였다.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해 김덕룡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답변했다"며 "소신 없는 사람"이라고 질타했다.

박근혜 대표의 국보법 전향적 선회에 급브레이크를 걸어온 한나라당의 김용갑 의원. 박 대표와 김 의원 사이에 어떤 해법이 찾아질지 주목된다.

지난 15일 점거농성중인 법사위회의실에서 의총을 앞두고 김용갑과 김기춘 의원이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다.
지난 15일 점거농성중인 법사위회의실에서 의총을 앞두고 김용갑과 김기춘 의원이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기춘 의원의 변신

한편 한나라당의 국보법 당론접근에는 김기춘 의원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주요당직자는 김기춘 의원이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 보수강경파의 반발을 크게 무마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70·80년대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 의원은 국보법개정안준비특위에서 활동하며 지도부에 개정초안을 보고하고, 의원들 앞에서 배경설명을 하는 등 당론을 수렴하는 데 앞장섰다.

16일 <내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춘 의원은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관계가 많이 변했고 국민들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며 "한나라당이 남북관계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을 바꿀 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최고위원 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기춘 의원이 `국가보안법 해설`책을 가져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지난 15일 최고위원 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기춘 의원이 `국가보안법 해설`책을 가져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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