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면 지붕 날아 갈까봐 겁나요"

통영 사량도 '복십자 수양관' 사람들의 추운 겨울나기

등록 2004.12.20 19:11수정 2004.12.21 09:38
0
원고료로 응원
통영시 도산면 가오치에 있는 사량 도선장에서 카페리호로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사량도(蛇梁島)에 도착한다.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두 섬 중 지도상 윗 섬을 '상도', 아랫 섬을 '하도'라고 한다.

사량도의 전경. 왼쪽 섬이 하도, 오른 쪽 섬이 상도
사량도의 전경. 왼쪽 섬이 하도, 오른 쪽 섬이 상도황원판
이 하도(덕동)에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복십자 수양관'이라는 곳이 있다. 복십자(‡)는 결핵환자를 돕기 위해 판매되는 크리스마스 씰, 엽서 등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결핵 환자에 대한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복십자 수양관도 이 결핵 환자를 위한 온정에서 마련된 시설이다.

이 수양관은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노숙자 등 무의탁 극빈 결핵 퇴원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지난 80년에 설립되었다.

사진은 하도. 맨 왼쪽에 있는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이 복십자 수양관이다.
사진은 하도. 맨 왼쪽에 있는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이 복십자 수양관이다.황원판
마산결핵병원에서 국비로 치료 받는 대부분의 중증 무의탁 극빈 환자들은 퇴원 후에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병이 재발해 다시 입원하거나 합병증으로 고생한다. 이처럼 딱한 사정을 잘 아는 국립마산결핵병원 내에 있는 작은 병원 교회인 벧엘교회(담임목사 김영삼) 교역자와 성도들이 복십자 선교회를 결성했다. 그들의 요양과 자활을 돕기 위해 이 수양관을 세워 지금까지 약 25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복십자 수양관 전경. 산과 바다, 신선한 공기가 어우러져 결핵 환자 요양에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복십자 수양관 전경. 산과 바다, 신선한 공기가 어우러져 결핵 환자 요양에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황원판

"어려워도 '오순도순' 정겹게 살아요"

기자가 이 수양관 지붕이 파손될 우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때가 지난 12월 18일. 하도에 도착해 길을 묻기 위해 덕동 대합실이라는 조그만 가게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마을 주민의 이야기에서 이들의 어려운 생활과 함께 훈훈한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도 그 사람들은 기름값 아끼기 위해 절대로 낮에는 보일러를 안 돌리고, 싸늘한 방안에서 그냥 지냅니다. 그래도 친 형제자매처럼 서로 도우면서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 결핵환자를 기피하기도 하지만, 저희 마을 주민들은 저분들을 꺼려하지 않고 벽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을에서 김장 김치를 드시도록 드렸습니다. 평소에 큰 물질적 도움은 못 드려 항상 아쉽지만 마음이나마 서로 나누며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아물지 않은 태풍 '매미'의 상처


수양관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파손된 집채. 뿐만 아니라 건물 주변에 널려 있는 나무 둥치 등에서 태풍 '매미'의 흔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난 해 태풍 매미로 물에 잠겼던 아픈 상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집 주변에 있던 닭장, 창고, 개집 등도 모두 태풍 때 쓸려가고 말았다고 한다.
지난 해 태풍 매미로 물에 잠겼던 아픈 상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집 주변에 있던 닭장, 창고, 개집 등도 모두 태풍 때 쓸려가고 말았다고 한다.황원판
창고로 변해 버린 방을 보며 허탈감에 젖어드는 정씨
창고로 변해 버린 방을 보며 허탈감에 젖어드는 정씨황원판
이곳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은 정경주(57·남)씨, 김형자(45·여)씨, 강창수(52·남)씨 등 세 명. 지난 92년부터 약 13년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정경주씨는 태풍 매미로 건물이 파손되어 어쩔 수 없이 떠난 다른 동료들 생각에 눈물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지난 해 태풍 매미로 건물이 물에 잠겨 많이 파손된 후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많을 때는 일곱 명 정도 생활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4명이 순천에 있는 다른 요양시설로 옮겨가고, 세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풍으로 지붕이 파손된 후 지금은 우레탄으로 슬레이트 사이에 땜질해 놓았지만, 그 틈새로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태풍으로 물에 잠겨 크게 파손된 방은 창고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재건축을 해야 되지만 많은 비용으로 계속 지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태풍으로 파손된 슬레이트를 우레탄으로 땜질해 놓았으나, 그 틈새로 비가 많이 새고 있다고 한다.
태풍으로 파손된 슬레이트를 우레탄으로 땜질해 놓았으나, 그 틈새로 비가 많이 새고 있다고 한다.황원판
파손된 방 천장에서 비가 오면 물이 샌다고 한다.
파손된 방 천장에서 비가 오면 물이 샌다고 한다.황원판
비가 새는 방의 벽면에 곰팡이가 많이 폈다.
비가 새는 방의 벽면에 곰팡이가 많이 폈다.황원판
"바람불면 지붕 날아 갈까 봐 겁나요"

이 섬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화제의 인물은 김형자씨. 20년 전에 부산대학교병원에서 '곧 사망할 것'이라며 치료를 포기했었다. 7년 전 마산결핵병원에서도 '3개월쯤 뒤에 사망할 것'이라며 치료를 포기했지만, 이 수양관에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질병과 생활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실례고 우문일 게다. 그래도 고충을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물어 보니 의외로 모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답한다. 게다가 "자신들을 돕고 있는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고까지 하는 게 아닌가.

산소발생기를 항상 사용해야 하는 김형자씨는 전기세가 가장 걱정이다.
산소발생기를 항상 사용해야 하는 김형자씨는 전기세가 가장 걱정이다.황원판
"아무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요…."

하지만 계속된 질문에 김씨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 어려움을 말했다.

"바람이 불면 지붕이 날아 갈까 봐 걱정입니다. 집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산소 발생기를 사용하는 관계로 전기세가 많이 나와 걱정입니다. 산소 발생기를 한 달 동안 쓰면 전기를 300킬로와트 정도 쓰는데, 일반 전기세와 합하면 누진세가 적용되어 20만원 이상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겨울에 쓸 기름이 좀 많이 있었으면…"

이어서 옆에 서있던 정경주씨도 다음과 같이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겨울에 쓸 수 있는 기름이 좀 많이 있었으면 제일 좋겠네요. 국민기초생활 수급과 복십자 선교회에서 도와 주는 생활비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전기세 등 각종 공과금을 내고나면 아무리 추워도 낮에는 보일러를 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결핵 환자들은 '따뜻한 곳에서 지내며,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한겨울 추위에 떨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어 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스스로 땀흘리며 살아가는 자활을 꿈꾸며

이 수양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크리스마스·새해 소망이 있다. 그것은 "하루 빨리 건강을 완전히 회복해 도움을 받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다. 또, 수양관을 예전처럼 다시 지어 흩어져 있는 동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땅을 일구며 스스로 살아가는 '자활'이 그들의 소중한 꿈이다.

정경주씨는 매미 이후 황폐해진 밭을 둘러보며, 다시 옛날처럼 흩어진 여러 동료들과 함께 모여 땀흘려 농사 지으며 생활할 수 있을 그 때를 소망한다.
정경주씨는 매미 이후 황폐해진 밭을 둘러보며, 다시 옛날처럼 흩어진 여러 동료들과 함께 모여 땀흘려 농사 지으며 생활할 수 있을 그 때를 소망한다.황원판
정경주씨도 가끔씩 매미 이후 황폐해진 집 주변의 조그만 논과 밭을 둘러보며, 스스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자활의 꿈을 가져본다.

이 복십자 수양관을 운영하고 있는 복십자 선교회(회장 김기현)에서는 태풍 매미 피해 이후 지금까지 2년째 수양관 건축을 위한 모금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으로 모금을 위한 후원 계좌를 운영하고 있다.

복십자 선교회 김영삼 목사는 다음과 같이 퇴원 후에도 갈 곳이 없는 결핵 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동참을 호소했다.

"오랜 결핵으로 인한 가정 파탄과 후유증, 합병증 등으로 퇴원 후에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고통받는 소외된 계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치료도 중요하지만, 오랜 투병으로 인한 가정 파탄 등으로 갈 곳 없는 많은 분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활을 돕는 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후진국 병'이라는 인식 때문에 언론에서도 보도를 기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다른 난치성 질병보다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매우 부족한 실정입니다.

앞으로 이들 퇴원 환자들이 스스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활'의 길을 열어주는 '복십자 수양관' 신축 모금에 계속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하루 빨리 이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뜻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랍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2. 2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3. 3 신체·속옷 찍어 '성관계 후기', 위험한 픽업아티스트 상담소 신체·속옷 찍어 '성관계 후기', 위험한 픽업아티스트 상담소
  4. 4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5. 5 전 대법관, 박정훈 대령 바라보며 "왜 '별들'은..." 전 대법관, 박정훈 대령 바라보며 "왜 '별들'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