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기억을 봉인하러 떠나다

앙코르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1)

등록 2004.12.20 02:34수정 2004.12.2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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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속 기억의 봉인

a 아란의 노점상, 태국의 국경도시인 아란은 국경도시다운 근엄함 대신 알 수 없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란의 노점상, 태국의 국경도시인 아란은 국경도시다운 근엄함 대신 알 수 없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 김정은

12월 8일 저녁 타이완을 경유하여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항 어디선가 낯익은 멜로디가 들려온다.


그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생각해봐요, 생각해봐요
그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는 절망속에서 그리고 그대는,
그대는 언제나 대답하지요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스산한 바람이 부는 이맘 때면 더욱 가슴을 울리는 냇킹 콜(Nat King Cole)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azs, Quizas, Quizas)>. 이 음악만 들으면 나는 습관적으로 한 영화를 떠올리며 4년 전 극장에서 넋을 잃은 채 바라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 속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반복적으로, 기운없어 보이는 한 남자를 응시한 채 따라가고 있었고 그 남자는 다 쓰러져가는 앙코르와트의 벽 속 자그만 구멍 속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후 사원의 그 구멍은 어느덧 진흙으로 메꾸어져 있었고 영화는 마치 그 묻어버린 비밀을 알고나 있다는 듯 알듯말듯한 자막을 쏟아놓으며 끝을 알렸다.

"사라져버린 세월은 한 무더기 벽과 같다. 먼지 쌓인 유리벽처럼….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벽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사라진 세월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a 허름한 짐수레 위에서 짐손님을 기다리는 소년들의 망중한

허름한 짐수레 위에서 짐손님을 기다리는 소년들의 망중한 ⓒ 김정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먼지 쌓인 유리벽과 사라진 세월이라……. 량차웨이의 쓸쓸한 뒷모습과 함께 등장했던 영화 속 앙코르와트는 당시 나에게 영원히 박제가 된 시간들의 편안한 쉼터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 <화양연화>는 내 마음 속에 많은 의구심과 함께 앙코르와트의 기억을 새겨 놓은 채 끝나 버렸다.

4년이 흐른 지금, 나는 쉴 새없이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2004년의 치열했던 삶의 기억들을 박제된 시간의 영원한 쉼터인 앙코르와트 돌 무더기 속에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 또다시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을 잠시나마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타이완 승무원에게 가르친 한국 말 "감사합니다."

그럭 저럭 비행기에 올라탔다. 타이완 국적기라서 그런지 기내는 대다수 중국인들로 혼잡했다. 그래서일까? 기내 승무원들도 비행기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한 두명의 한국인의 존재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나에게 무슨 말을 걸 때도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말했다.

한 두번은 얼굴이 비슷해 그려러니 했지만 영어로 다시 묻고 다시 대답하는 게 은근히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나는 한국인이고 중국어를 모른다고 공표해버렸다.

그랬더니 이 승무원, 조금 겸연쩍었든지 갑자기 살갑게 다가와 한국어로 '탱큐'를 무어라고 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웬 한국어? 아무리 타이완에 한국 드라마와 노래가 인기라 하더라도 이런 돌발적인 행동은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의도된 행동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합니다"를 몇 번 반복해서 외우게 했다.

어설픈 발음으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승무원이 사라진 뒤 갑자기 '아뿔싸'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타이완 승무원에게 왜 "고맙습니다"가 아닌 "감사합니다"를 가르쳐주었을까? 이왕 가르쳐주려면 한자어보다는 순수 우리말을 가르쳐주었어야 하는데. 얼떨결에 뱉어버린 내 실수가 왜 그리 한심해 보였는지.

때 마침 여름 옷으로 갈아입은 내 맨 살에 자잘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 자잘한 소름의 정체가 냉방 잘된 기내의 에어콘 바람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소름의 정체는 캄보디아란 낯선 나라에서 6일 동안 겪게 될 낯선 호기심과 막연한 두려움 때문 아닐까?

방콕 돈무앙 국제공항에 내린 시간은 다음날 새벽 1시 40분. 아침 일찍 캄보디아 국경이 있는 아란 지역으로 가서 캄보디아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잠시잠깐의 휴식이 절실했다. 곧바로 호텔로 직행하여 1~2시간동안 눈을 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만약 그 때 단 몇 시간의 휴식도 없었다면 그 길고도 괴로운 비포장 황톳길 여정을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캄보디아 국경의 구걸 소녀

a 관광객들 상대로  아이를 안고  구걸하고 있는 소녀,  상대방을 바라보는 까무잡잡한 눈동자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관광객들 상대로 아이를 안고 구걸하고 있는 소녀, 상대방을 바라보는 까무잡잡한 눈동자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김정은

아침 7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태국의 국경도시 아란야브랏테(보통 줄여서 아란이라고 함)로 가야 한다. 국경도시인 아란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국경도시다운 근엄함 대신 알 수 없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국경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꽤 규모가 커 보이는 주변 시장에 넘쳐나는 싸구려 생필품들,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허름한 수레를 모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기 위해 출국심사대에 한없이 늘어서 있는 기나긴 사람들의 행렬.

마치 사람 살아가는 일상을 축소한 것과 같은 이 지역의 풍경은 여행객의 끊임없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태양은 머리 위에 작열하고 있는데 출국심사를 위해 기다리는 줄은 아무리 기다려도 줄어들 줄 모르니 가뜩이나 수면이 부족하다 싶은 몸이 천근 만근 무게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머리 위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은 그나마 있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듯하다. 그 뿐인가? 자칫 잘못하면 소매치기 당하기 쉽다는 말에 난 한껏 움츠려 있었다.

이런 여행객의 모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린아이를 안은 맨발의 소녀가 유유히 다가와 한 푼을 구걸하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상대방을 바라보는 까무잡잡한 눈동자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있었다. 그 소녀의 눈동자를 보니 문득 이들에게 무심코 돈을 주었다간 주위에 몰려드는 구걸자들 때문에 경을 치르기 쉽다는 경고가 갑자기 떠올라 억지로 시선을 외면해야 했다.

국경 지역 내 보세구역에 들어 선 카지노

a 태국의 출국심사대 에 줄 서있는 사람들, 왼쪽은 태국인, 오른쪽은 외국인 전용 심사대이다.

태국의 출국심사대 에 줄 서있는 사람들, 왼쪽은 태국인, 오른쪽은 외국인 전용 심사대이다. ⓒ 김정은

얼마를 지났을까?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행렬도 어느새 점점 줄어들고 거의 3시간 정도가 흐른 12시에야 천신만고 끝에 태국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캄보디아를 육로로 넘을 수 있는 유일한 국경지대인 이곳이 이처럼 번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도박을 좋아하는 태국인들이 자국의 감시를 피해 국경 넘어 캄보디아 보세구역에 카지노 호텔을 건립하고부터라는 설이 있는데 이런 설을 증명하듯 캄보디아 보세구역 내에는 이런 저런 카지노 호텔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있었다.

a 캄보디아 국경모습 , 저 앞에 보이는 문을 넘으면 캄보디아이다.

캄보디아 국경모습 , 저 앞에 보이는 문을 넘으면 캄보디아이다. ⓒ 김정은

태국인과 도박이라…. 얼핏 겉모습만 보면 이처럼 도박을 좋아하는 태국인 덕분에 캄보디아 정부의 수익이 클 것이라 예상하기 쉽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이 곳 보세지역에 있는 호텔 모두 태국인이 세운 것이므로 태국인들이 국경을 넘어 소비하는 비용은 가뜩이나 가난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태국인들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 뿐인가? 카지노로 국경을 개방한 탓에 태국은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한 전 세계 여행객들의 통로로 캄보디아보다 더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형편이니 이래 저래 태국 쪽만 남는 장사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캄보디아의 입국심사장, 이곳에서 비자를 발급받는다.

캄보디아의 입국심사장, 이곳에서 비자를 발급받는다. ⓒ 김정은

캄보디아 비자를 발급받는 동안 잠시 보세구역 안 호텔에서 점심을 간단히 한 다음 곧바로 캄보디아 국경을 넘었다. 이제 쉬지 않고 앙코르와트가 있는 고장, 시엠립으로 출발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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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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