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아줌마들의 무 썰기오창경
저녁을 먹은 후에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옆집 할머니 집에 들어서니, 방문 밖에서부터 벌써 도마 소리가 정겹게 들려옵니다. 방 안에는 우리 동네에서 젊은 축에 끼는 아줌마들은 다 모여 있었습니다. 어쩌면 올 겨울이 시작된 후에 이렇게 동네 여인네들이 모인 일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들 하나 덜렁 낳아 놓고 남편은 군대에 가버렸는데 시어머니는 모시틀에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지. 나는 잠이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벤소(변소)간에 앉아서 졸았어. 근데 꿈인지 생시인지 그렇게 선명하게 우리 수호 아부지가 군복을 입고 대문간으로 들어서쟎여.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뛰쳐 나간다는 게 주저앉아 버렸당께."
73세 김경희 여사의 젊은 날의 추억담이 무 써는 소리 속에 한참이었습니다.
"어머나, 어쩐디야? 그래서 에피통에 빠졌남유?"
소녀처럼 여린 성격의 66세 이윤희 여사가 무 썰기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잠깐, 에피통이 뭔데요? 혹시…."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시골살이를 즐기고 있는 저는 사소한 사투리 한마디도 그냥 놓칠 수가 없었지요.
"에이, 또망말여. 그거 있쟎여."
60세 김부자 여사가 '에피통'의 뜻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 또 다른 사투리를 불러왔습니다.
"이잉! 또망? 웬 불어? 이거 충청도 사투리인지 불어인지 모르겠네…."
저는 다시 헛갈리고 말았습니다.
"무수 쓰는데(무 써는데) 드럽게 똥수간 얘기는 다 나온디야. 가서 손들 씻고 와."
깔끔하고 손맛이 좋기로 소문난 박명우 여사의 핀잔이 이어졌습니다.
"저 잡것은 원판(어지간히) 깔끔도 떤다니께. 화장실 얘기만 해도 손을 씻으러 다니면 오늘 이 많은 무수는 언제 다 쓸겄냐(썰겠냐)?"
박명우 여사와 절친한 친구 사이인, 우리 동네 멋쟁이 김순희 여사였습니다.
저는 대화를 통해서 '에피통'과 '또망'의 뜻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충청도 사투리가 불어 발음과 비슷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무 써는 일보다 저한테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에피통에 빠졌슈? 안 빠졌슈?"
""빠질 뻔했는데…… 걸쳤지."
김경희 여사의 입담에 우리 동네 아줌마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겨울밤을 가릅니다.
"그나저나 올해는 날이 춥지 않아서 폭폭 김장 짠지(김치) 시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해가 바뀌게 생겼네. 또 한 살 더 먹으면 무신 재미로 사나?"
김순희 여사가 무심한 세월 탓을 합니다.
"얼라, 혼자 사는 우리도 있는데 서방 있는 것이 더하네?"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고만고만한 다섯 아이들과 사느라 고생한 박명우 여사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