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생 춘양목, 장승으로 태어나다

[전래 장승 제작 참관기 - 상] 경북 문경

등록 2004.12.24 12:41수정 2004.12.2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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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1·12일과 18·19·20일 5일간에 걸쳐서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문석곤(55)씨의 집 마당에서는 개인의 발주로는 보기 드문 대형 장승 제작이 있었다.

평범한 개인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자신의 마당에 장승을 세우는 것이 예삿일은 아니다. 기층 민중 무형문화 유산의 중요한 한 부분인 장승을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마당에 세우는 이 일이 필자는 전통문화를 즐기는 바람직한 '문화의 향수'로 여겨졌다.


이 두 쌍의 장승 제작 전 과정을 참관한 기록을 2회에 걸쳐 요약한다.

장승 전승자 이가락씨가 제작 맡아

두 쌍의 장승 중 여기서 다루려는 한 쌍은 하동 쌍계사 입구에 서 있었던 5m 높이의 대형 전래 장승과 같은 모습이다.

이 장승은 마을 주민의 협동작업으로 제작되던 보통의 수호 장승과는 달리, 전문적 조각기술을 가진 목조각가가 발주자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아름다운 장승으로, 과거에 세워진 것도 흔하지 않고 최근에 자주 세워지는 장승도 아니다.

이번 장승의 재료목은 최고의 소나무로 치는 금강송 중에 경북 춘양 지방의 61년생 46년생과, 51년생 48년생 길이 5m 내외의 잘 생긴 춘양목이었다. 저렴하게 구입했다는데도 원목 4개의 가격만 100만원이 넘는다.


장승 제작에 바치는 개인의 투자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돈이므로 제작 후 판매하려는 목적인지 물었으나 문씨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저 장승이 좋아 세우는 것이며 이런 작업이 평생 민속품을 취급한 사람으로서 도리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한다.

아는 이를 통해 문씨의 순수한 뜻을 전해들은 '대한민국 장승제작기능 전승자' 이가락(본명 범형)씨가 춘천에서 왕복하는 거마비 정도의 사례만으로 장승 제작을 맡았다.


보통 장승은 하루만에 다 만들어진다. 5m급 대형 장승 4기를 8일에 걸쳐 만드는 것은 장승의 제작일치고는 대단히 긴 시간에 속한다. 두 기의 장승 중 하나는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다른 하나는 기계톱을 병용하여 전래의 조각 방식과 기계톱을 쓴 결과를 비교해 보자고 기자가 제안하여 그대로 하였다.

결국 세세한 다듬질은 끌질로 마무리가 되므로 조각 결과에 차이를 발견할 수는 없었고, 실제로 요즘엔 제작자들이 대부분 기계톱에 많이 의존한다. 이것은 원목의 필요 없는 부분을 걷어내는 과정이므로 실제 조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왜란의 길목에 세워지는 아름다운 장승

장승이 세워진 문석곤씨 집 마당에서는 문경 새재가 뚫린 주흘산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그의 집터는 임진왜란 때 상주를 거친 소서행장의 군대가 신립이 철수한 텅 빈 새재를 유유히 넘어 한양으로 향하던 바로 그 길목이다.

소서행장은 "우리가 지나가는 곳에 풀 한 포기도 남기지 말라"고 명했을 만큼 가장 악랄한 초토화 작전을 쓴 왜장으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살육과 방화의 잔치를 벌였던 인물이다. 400년 전 비극이 지나간 이 땅에 아름다운 전래 수호장승이 세워지는 역사의 감회가 새롭다.

장승 제작 과정

a 박피작업

박피작업 ⓒ 곽교신

박피 작업. 속껍질(송기)까지 완전히 벗겨내지 않으면 완성된 장승 표면이 붉게 변색되어 보기 싫다.

전통 방식의 'ㄷ' 자 탈피기로 수피를 벗겨내는 수작업을 하는데 원목 한 개당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간단하고 수월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나무를 대하는 첫 작업인 만큼 이 과정에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고.



a 밑그림 그리기

밑그림 그리기 ⓒ 곽교신

원목에 맞는 장승 얼굴을 구상하며 땅에 밑그림을 그린다. 제작자는 이 과정을 주목해 줄 것을 특별히 주문하였다.

제작자는 원목을 본 순간 나무의 형상에 맞게 순식간에 머리에 떠오른 장승 얼굴을 구체화시켜 보며, 장승의 인상에 대한 발주자와 제작자 상호간의 협의도 이때 이루어진다.

장승 제작 때마다 모두 이런 스케치를 하지는 않는다는 게 이가락의 말이다. 땅 바닥에 이런 식의 스케치 구상은 하지만 종이에 도면을 그려보거나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a 눈의 윤곽 잡기

눈의 윤곽 잡기 ⓒ 곽교신

눈의 윤곽 잡아가는 과정. 퉁방울 눈은 장승의 공통점이다. 사람도 눈의 모양에 따라 인상이 각각이듯이, 장승도 눈의 위치, 모양, 크기에 따라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장승의 인상 표현은 극도의 과장과 생략의 연속이다. 위엄, 벽사의 강조 등 장승 본래의 목적을 위해 과장과 생략은 필수였을 것이다. 특별한 조각기술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공동작업이었던 장승 세우기가 세밀한 묘사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대충 파기"가 "과장과 생략"의 근원이기도 할 것이다.

a 인중 파기

인중 파기 ⓒ 곽교신

인중 파기. 코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인중을 깊게 파들어가는 것은 모든 장승의 공통점이다. 이 부분은 얼굴과 같은 비율로 입이 크게 벌어지거나 이빨의 크기가 눈보다 크게 조각되는 등 과장과 생략의 극치이다. 일반인이 장승을 연상하면서 떠오르는 모습은 거의 이 부분에 집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승의 주요 기능이 '벽사'인 것을 생각할 때, 악귀에 대한 공격 자세의 동물적 기본형인 크게 벌린 입과 강조된 이빨이 새겨지는 중요한 공간이다.

a 얼굴 전체 윤곽 다듬기

얼굴 전체 윤곽 다듬기 ⓒ 곽교신

얼굴 전체 윤곽 다듬기. 눈의 깊이와 콧날의 각도를 세밀히 조정하고 동시에 뺨의 표면을 다듬으면서 인중의 바닥까지 완만한 곡면으로 파고 내려간다. 과감한 생략법이 사용되면서도 장승 고유의 인상이 표현되는 부분이다.

뺨에 곤지를 찍은 장승도 있으나 이것은 전래의 방식은 아니다. 해학을 특별히 강조한 장승의 경우 입이 뺨을 가로질러 치켜 올라가는 것도 있다. 이번 장승의 경우 인중 아래 부분이 벽사의 기능이라면 인중 윗부분은 친근한 느낌이 들도록 배려한 제작자의 의도가 있는 듯하다.

a 눈 윤곽 파기

눈 윤곽 파기 ⓒ 곽교신

눈의 깊이는 장승마다 천차만별이다. 이 날 제작한 장승은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모습의 장승이 최초로 전해진 쌍계사 입구의 전래 장승보다 눈의 깊이를 깊게 조각했다. 이 정도의 깊이로 파내려면 품도 많이 들고 입체감의 균형도 그에 맞게 창조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런 독자적 변형은 전통 장승을 집안에 세우고 싶어하는 발주자의 문화 취향을 고려한 제작자의 조형적 배려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장승은 공격적이고 무서운 느낌보다는 친근한 느낌이 더 강한 '아름다운 장승'으로 태어났다. 발주자의 부인은 완성된 장승을 보며 "너무 예쁘다"를 연발했다.

장승은 목적에 따라 부분적 변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든 장승에 고정된 정형의 틀이 없다는 것은 정설이다. 이 자유로운 변형은 석장승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공이 쉬운 목장승의 특권이기도 하다.

a 눈썹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성된 눈 부위

눈썹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성된 눈 부위 ⓒ 곽교신

눈썹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성된 눈 부위. 눈 사이의 주름을 과장하여 혹으로 표현함으로써 해학성을 높임과 동시에 둥근 원목에 밋밋하게 새겨야 하는 장승의 이마 부분에 입체감을 준다.

이 주름은 화를 내거나 특정한 곳을 주목할 때 보이는 실제 미간을 세밀히 크로키한 것의 변형으로도 보인다.

특히 이 부분에 집중된 조형미가, 이 장승이 전문조각가에 의하여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중요 근거가 되는 듯하다.

a 입 부분의 세밀한 모양

입 부분의 세밀한 모양 ⓒ 곽교신

입 부분의 세밀한 모양. 이 장승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장승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송곳니가 위로 뻗어 있는 것은 도깨비의 이빨을 연상시키지만 어딘지 무섭지는 않다.

도깨비는 대표적인 벽사의 상징이지만 결코 무서움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악귀에겐 무섭지만 사람에겐 어진 것이 우리의 도깨비다.

장승 전체의 중앙 부위인 이 부분은 나중에 흰색의 회칠로 칠해져서 전체적으로 색 감각의 균형을 맞춰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발주자의 부인은 흰 회칠을 입히는 것을 보며 "우리 장승 화장하시네"하며 좋아하였다.

이빨을 새기기 위한 부분을 평면으로 만들 때는 기계톱으로 대충 평면 다듬기를 하여 제작 시간을 절약하였다.

a 수염 조각

수염 조각 ⓒ 곽교신

자귀로 수염을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있다. 쌍계사 입구 원래의 전래 장승은 곧은 수염으로 되어 있다.

똑같은 모양의 10m 높이 대형 장승이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며 강원도 평창군에 세워졌는데 그 장승의 수염 역시 곧게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휘어진 것은 제작자의 창안으로 장승의 딱딱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다듬고자 시도한 것이라 했다. 이 역시 이 장승을 발주하는 문석곤씨의 의도에 맞추는 제작자의 배려로 보인다.

a 조각 마무리

조각 마무리 ⓒ 곽교신

'천하대장군' 등 장승을 세우는 목적에 맞는 발원문을 쓰는 부분(비문)을 제외한 전체가 완성되었다. 이 단계까지 완성하는 데 꼬박 하루해가 넘어갔다.

흔히 비문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의 정형화한 한자 성어를 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2002년 월드컵 때는 비문으로 "오 필승 코리아!"를 한글로 적은 장승도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장승의 모습에 정형이 없는 것처럼 비문도 고정된 문장의 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먹물로 눈과 눈썹을 그려넣고 이빨에 흰 회칠을 하고 휘어진 수염에 먹물을 입혀 채색을 하게 된다.

(나머지 제작 과정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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