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석공예 명장'을 만나다

돌과 더불어 살아온 30년, 석조문화의 전령사 '김상규'

등록 2004.12.27 12:53수정 2004.12.3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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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가운 돌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경상남도 양산 시내에서 35호선 국도를 타고 하북면 쪽으로 한참 달리다 보면 통도사 IC 조금 못미처 '솥발산공원묘원'과 '삼덕공원묘원'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회전해 한 500m쯤 올라가면 왼쪽 산자락의 널찍한 곳에 몇 점의 석조각품이 눈에 띈다.


여기가 바로 '석공예 명장 김상규'씨가 운영하는 만평석재(滿坪石材)다. 좁은 돌계단을 오르니, 미리 연락을 받은 이집 주인장이 반긴다.

a 석공예 명장 '김상규'

석공예 명장 '김상규' ⓒ 전영준

5년 전 손수 터를 고르고 건물을 올려 마련한 이곳에서 우리 시대의 석공예 명장 김상규씨는 차가운 돌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돌 조각하는 사람들에겐 작업장으로 쓸 만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돌먼지에 시끄러운 소리가 싫다고 입을 대는 사람들을 피해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그가 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 그해 처음 문을 연 부산공예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예능계열의 전문교육기관이 거의 전무했던 터라 솜씨 있고 재간 있는 아이들에게 공예학교의 개교는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일찌감치 기능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소년 김상규에게 공예학교 입학은 망설일 것 없는 선택이었다.

a 표충사경내 돌계단난간

표충사경내 돌계단난간 ⓒ 전영준

나중에 부산공예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고 지금은 부산디자인고등학교가 된 이 학교 첫 졸업생이기도 한 그는 모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자신이 오늘날 석공예 분야에서 최고의 고수인 '명장'이 된 것은 일찍이 공예학교의 석공예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부산디자인고등학교의 운영위원을 맡기도 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모교의 후배들을 건사하기도 한다.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산실 '만평석재'

힘들고 시끄럽고 먼지 날고…, 흔히들 '조각의 3D'라고 부르는 게 돌조각이다. 그런데다 수요조차 많지 않아 요즈음은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젊은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도 한사코 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하겠다는 후배들이 기특하고 대견하지만, 그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기가 버거워 처음에는 후배들을 받는 일을 망설였다.


그래도 굳이 거두어 달라는 뜻을 떨치지 못하고 받아들이다 보니 그동안 그의 밑을 거쳐 간 후배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 후배들 중에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둘이나 나왔고 국내대회의 메달리스트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다 보니 만평석재는 이 분야에서 '메달리스트의 산실'로 통하기도 한다.

"사실 국제기능올림픽은 물론 국내대회에서도 메달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한 서너 달은 아무것도 안하고 오직 창작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식솔들이 딸려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장 생계문제가 발목을 잡지요. 다행히 우리 만평석재에서는 먼저 메달을 딴 선배들이나 동료들이 서로 힘을 보태 뒷바라지를 해 줍니다."

'아, 그렇구나. 만평석재가 공연히 메달리스트의 산실이 된 것이 아니구나. 이처럼 동료와 선ㆍ후배 사이의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이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군가가 우리 석조문화를 바로 잡는 일에 매달려야 할 텐데…

a 작품 ‘기둥 2003’ / 800×3000×6000

작품 ‘기둥 2003’ / 800×3000×6000 ⓒ 전영준

한반도에는 화강암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우리나라는 석조문화가 발달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단단하고 거친 화강암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매만져 부드럽고 담백한 조형으로 빚어낼 줄 알았다.

전국에 천여기가 넘는 석탑과 석굴암 등 많은 석불과 부도 등의 섬세한 조각을 보면 선조들의 빼어난 솜씨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찬란한 석조예술은 통일신라를 정점으로 고려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예술적으로 평가를 받을 만한 석조예술품이 점차 줄어들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석공예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늘의 석공예 명장 김상규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작은 암자는 물론 중요 사찰에도 왜색이 침투해 우리 석조문화를 어지럽히고 있어 이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데 요즈음은 값싼 중국산 수입품이 활개를 치고 있어 더욱 걱정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석조문화를 바로잡는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a 부산 동서대 기념탑

부산 동서대 기념탑 ⓒ 전영준

한 분야의 명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냥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민이다. 그래서 이미 동의공업대를 거쳐 국립박물관대를 수료하고 현재 영산대에 적을 두고 있는 등 그동안 학문연마에 적잖은 노력을 기울인 터이지만 내년에는 동국대 불교미술 석사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우리 석조예술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할 계획이다. 우리의 석조예술이 불교미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녁의 작업장인 만평석재를 대한민국 석조예술의 새로운 계보를 형성하는 메카로 삼으려는 야심찬 계획도 불태우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돌을 만진 세월이 어느새 30년. 32살이던 1990년에 최연소 '석공예 명장'이 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도록 애오라지 돌과 더불어 살아오며 노동부장관 표창, 경남도지사 표창, 부산광역시장 표창 등의 수상경력을 쌓았다.

부산 동래 금강원 '독보 허중배 선생 기념비'를 비롯해 부산 부경대 정문 문주, 동서대 기념탑, 거제시 사동 삼거리의 '양달석 기념비', 통도사 '청하 스님 부도탑'과 중요 사찰의 사리탑이나 석등, 각종 조형물 등 수십 점의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빚어졌다. 석조각가를 우리 역사의 기록자요, 문화의 전령사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 이녁의 어깨에 한국 석조문화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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