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 청년에게 을유년이 특별한 이유

[포토에세이] 신새벽을 여는 닭처럼

등록 2004.12.31 00:00수정 2004.12.3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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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갑신년(甲申年·원숭이)이 가고 을유년(乙酉年·닭)이 다가옵니다. 어느 해나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날들이기에 각별하지만 제게는 '닭의 해'가 더 각별합니다.

60대 초반 서울 변두리에서 추운 겨울에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고 두 주도 안 되어 큰 수술을 했습니다. 그것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한 수술이 아니라 수술도 못해보고 아이를 잃었다는 죄책감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수술이었습니다.

의사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수술비는 고사하고라도 수술을 한들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러나 차마 계란 한 판을 들고 병원을 찾아간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은혜를 입은 어머니는 간혹 시내에 나갈 때면 계란을 들고 병원을 찾아 아들이 잘 자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그저 인사치레인 줄로 알았습니다. 의사도 포기했던 그 아이가 결혼식을 앞두고 예비신부와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노년의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너무 멋진 청년이 되었군요."

그 청년의 어릴 적 별명은 '계란 한 판'이었습니다. 양계장을 하던 부모님들이 수술비도 없어 계란 한 판을 가지고 눈물로 호소해서 살려낸 아들이었으니 늘 "야야, 너는 계란 한 판 때문에 살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셔서 식구들 사이에서 불리던 별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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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보릿고개를 넘나들던 어린 시절, 양계장을 하던 부모님에게 있어 사람은 굶어죽을지언정 닭은 빚을 내서라도 사료를 먹여야 했습니다. 덕분에 하루 세끼 밀가루 음식에 계란과 폐사한 닭고기만 물리도록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계란을 짚으로 10개씩 싸서 큰 대야에 담아 시내나 장터로 팔러 다니셨지만 그것으로는 양계장 유지하기도 힘이 들었나 봅니다. 아무튼 어린 시절 계란과 닭고기만 보면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떤 분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 닭고기를 물리도록 먹었다구?"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또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계란, 닭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지라 저에게 닭의 해인 을유년이 각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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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닭은 신새벽을 알려주는 동물입니다. 어둠과 빛의 경계, 혼돈(chaos)에서 질서(cosmos)로 넘어가는 시간의 경계를 알려주는 동물이죠. 그런 점에서 닭은 악귀를 물리치고, 액을 물리치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지금 도시에서는 잊혀진 소리지만 어릴 적만 해도 미명의 시간에 울려 퍼지던 '꼬끼오!'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80년대 암울한 시대에 신새벽을 기다리며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두 눈이 가리우고, 귀마저 막혀 버려도
혀는 잘리워서 입은 말 못해도
몸뚱이로 말하라!
이 땅에서 들리는 민중의 함성
바람따라 자유가 뚜벅뚜벅 걸어서 돌아오는 날까지
말하라!
말하라!
몸뚱이로 말하라!


유신치하에서 비장하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은 이제 그 이후의 행적 때문에 코미디처럼 되어버렸지만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원숭이 해를 보내면서 어쩌면 우리가 잔나비들의 자잘한 재롱에 놀아난 해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닭의 해, 새해에는 닭의 홰치는 소리와 함께 우리 국민들을 농락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국민들이 행복한 신새벽이 뚜벅뚜벅 걸어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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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닭은 볏을 가지고 있기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두고 공부하던 선비들의 방에 닭의 그림을 그려 걸었다고 합니다. 닭의 볏이 관(冠)을 쓴 모습과 비슷했기에 과거급제의 염원을 담아 그려둔 것이겠지요.

닭에 관한 글을 쓰려고 닭을 찾아 다녔습니다. 흔하던 것도 막상 필요하면 귀한 것처럼 갑자기 닭을 찍으려니 이전에 찍어둔 사진 한 장만 달랑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인이 알려준 곳을 찾았을 때 낯선 이방인의 출입에 깜짝 놀란 닭들이 한 구석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그 중 한 놈은 가장 앞서서 낯선 이방인의 출입에도 꼿꼿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이방인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구석으로 도망간 닭들 중에도 수탉이 있었는데 유독 그 놈만 당당하게 나서는 것을 보니 그가 대장인 모양입니다.

'닭의 세계에서도 대장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을유년 새해에는 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영물 닭의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면서 국민들 억장을 뒤집어 놓지 말고, 지도자답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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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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