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노동의 새벽>은 '현재진행형'

20주년 기념 복간과 헌정 음반 출시를 지켜보며

등록 2004.12.29 14:59수정 2004.12.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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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이와 같은 짤막한 서문이 수록된 시집 <노동의 새벽>이 1980년대 중반 무렵 발간되면서, 박노해라는 이름은 당대의 문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에 비로소 '노동자에 의한 노동 현실을 노래한 시'가 등장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고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민중들의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의 형상'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노동자였던 박노해는 작품에서 몸소 체험했던 노동의 현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대표작인 시 '노동의 새벽'에서처럼 새벽녘, 밤샘 노동에 지친 육신에 찬소주를 부으며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 기어코 깨뜨'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노동자의 햇새벽이 / 솟아오를 때까지'를 절규하는 노동자의 형상은 너무도 생생하게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다가왔다.

노동자들의 진솔한 생활을 꾸밈없이 그려낸 그의 시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상당 기간 동안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역시 그 이전까지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현실에 비로소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시들은 당시까지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던 노동자의 현실을 비로소 문학의 현장으로 불러냈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문학이 지식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주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등장 이후 노동자들의 작품 활동이 문학계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분명히 각인시킨 '노동(자)문학'이라는 개념 역시, 박노해라는 한 노동자 시인의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논할 수 있다.

이제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채광석은 1984년에 발간된 시집 <노동의 새벽>의 해설을 쓰면서, '박노해의 작품은 1970년대 이래 이 땅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현실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노력한 고통의 결실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박노해의 '모든 시들은 어떤 관념의 눈으로 밖에서 들여다보고 그리는 남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뿌리박고 살아가는 작자 자신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박노해에게 원고를 건네 받은 채광석은 '민중문학의 실체를 찾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것을 시집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독재 정권 시절에 이러한 내용의 작품이 실린 책을 출간하는 것은, 작가뿐만 아니라 편집인과 출판인 또한 구속과 탄압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한 채광석 등의 노력에 의해, 1984년 마침내 한 출판사에 의해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책으로 발간된 이후 한동안 그의 시집은 독재 정권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라, 대학가와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유통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기까지 그는 '얼굴없는 시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처음 출간된 시집에는 박노해에 대하여, '1956년 전남 출생 / 15세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는 내용의 간략한 작가 소개가 기재되어 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무렵에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핵심적인 멤버로 활동하면서 '노동해방의 전사'라는 호칭을 얻기도 하였다.

그의 필명인 '노해'가 '노동해방'의 준말이라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사노맹' 활동가 시절에 '노동해방문학' 등의 잡지에 쏟아낸 그의 수많은 글들은 당시에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는 '박노해'가 가공의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박노해라는 인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추측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대체로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자 시인'이었던 그의 내력을 꼬투리로 삼았던 까닭이라고 짐작된다.

여하튼 열악한 노동 현실을 체험하면서 살아야했던 그이기에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고, 그것을 자신의 필명으로까지 삼았던 것이다.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그는 자신이 지닌 '불온한' 사상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결국 수배 6년이 넘어선 1991년 3월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독재 정권 치하의 검찰은 그에서 사형을 구형하였다. 최종적으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7년여를 감옥에서 지내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1998년 8월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되었다.

이후 활발한 집필 활동을 벌이면서,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기억하는 일부의 독자들은 그에게서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회적 조건이 크게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의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박노해를 흔히 변했다고 말하는데 그는 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오후처럼 발전한 것이다'라고 한 시인 고은의 말처럼, 일단 그의 변화를 '창조적 변화'의 모색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제 그의 시집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되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 사회도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달라졌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라면 <노동의 새벽>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이상 '불온한' 작품이 아닌, 공개된 장소에서도 마음껏 읽히고 노래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은 1980년대에도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노동현장에서 활발하게 불려졌다. 노래와 연극으로 만들어진 그의 시들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문학적 성취를 넘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하나의 중요한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짧은 서정시들은 흩어지면 독립체요 모여서는 서사적 장시 또는 연작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이제 그로부터 만 20년이 지난 2004년, 시집의 서두에서 그가 지적했던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21세기에 접어든 이 땅에서는 여전히 '노동현실의 개선'을 요구하며, 수많은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박노해가 부르짖었던 '노동의 새벽'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에게 '완성형'이 아닌 '미래형'인 것이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옥죄는 비정규직 문제가 덧붙여지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현실은 새로운 노동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할 직장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청년실업'의 문제 역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다.

2004년 세밑에 24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어느 한순간에 비정규직으로 내쫓겼다가, 재계약을 하지 못해 죽음으로 항거했던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은 이제 우리의 노동 현장에서 더 이상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변하지 않았기에,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많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시집 <노동의 새벽>에는 모두 4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에는 작업 중 기계에 손이 잘린 동료의 손을 묻으며 절규하는 화자의 모습('손 무덤')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다시 시작될 다음날의 노동 때문에 늦은 귀가도 불안하게 여겨야 하는 노동자의 암울한 현실('평온한 저녁을 위하여')이 실감나게 제시되기도 한다.

간혹 이 시집에 수록된 몇몇 작품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감상이나 고발의 차원에 머문 것도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시인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구체적 현장성이 모든 시들의 피와 살을 형성하고 그 시들을 살아서 펄떡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노해의 시에는 또한 사랑의 건강함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비록 남들처럼 예쁘지 않더라도 서로 듬직한 노동의 동지이며 연인인 아내를 가장 사랑한다는 화자의 진솔한 고백('천생연분')이 나타나기도 하고, 직장에서와 달리 가정에서는 남편이라는 위치에서 아내에게 군림했던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깨우치는 화자의 반성('이불을 꿰매면서')이 형상화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시인은 비록 남들보다 못한 노동자 신세이지만, '이 땅의 노동형제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는' 노동해방의 그날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아름다운 고백')

그리하여 그의 시집을 발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채광석은 <노동의 새벽>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노동 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절망과 슬픔, 원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히 담아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향한 주체적 일어섬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일궈 내는 민중해방의 정서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때문에 비록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구체적 형상이 오늘의 노동 현실에 비추어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그의 시들 속에 담겨있는 삶의 '진정성'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노동자의 삶의 조건이 더욱 개악되고 있는 현실에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오늘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지금도 박노해의 시들은 계속해서 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다. <노동의 새벽>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단일한 시집 중 가장 많은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라는 기록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2004년 12월, 신촌의 한 대학에서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공연이 열렸다. 신문기사를 통해서 이 소식을 접하고 나와 아내는 일찍부터 표를 예매했고, 3시간 여에 걸쳐 진행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번갈아 부른 노래들 중 몇 곡은 나에게도 익숙한 가락에 실려있었고, 나머지 몇 곡들은 새롭게 해석된 빠른 가락에 실려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연에 맞춰 헌정 음반과 함께 시집도 다른 출판사로 옮겨 재차 출간되었다. 공연 현장에서 음반과 시집을 구입하였고, 운이 좋게도 근처에 앉은 박노해 시인에게서 책과 음반에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공연 도중 사회자의 말에 의하면, 박노해는 헌정 공연에서의 인사말을 끝내 사양하였다고 한다. '<노동의 새벽>은 이제 더 이상 저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마도 특정 인물이 아닌 특정 시집에 대한 헌정 음반을 만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시집이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펴낸 복간본 <노동의 새벽>에는 박노해 자신이 쓴 서시 '스무살의 새벽 노래'가 덧붙여져 있다. 또한 책의 뒷부분에는 1984년에 쓰여진 채광석의 '해설'과 새로운 시집의 편집인이라고 밝힌 강무성의 헌사(獻辭) '저주받은 고전의 기억, 얼굴없는 시인의 얼굴'이 새롭게 수록되었다.

처음 시집이 출간될 무렵에는 익숙한 단어였으나 새로운 세대에게는 생소해져 버린, 박노해의 시에 사용된 몇몇 낱말들을 시집의 말미에 따로 모아 부록으로 덧붙인 것도 새로 출간된 복간본이 주는 미덕이라 할 것이다. 시집을 새로 출간하면서 아마도 박노해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서시 '스무살의 새벽 노래'의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스무살이 되기까지 /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다 / 새벽은 이미 왔는가 / 아직 오지 않았는가 //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가운 소주를 부으며 / 온몸으로 부르던 새벽 / 그때 우리는 스무살이었다 // … (중략) … // 스무살 가슴에 아픔이 없다면 / 스무살 가슴에 슬픔도 분노도 없다면 / 그 가슴은 가슴도 아니리 / 스무살 아프던 가슴이 새로 스무살이 되어 / 다시 새벽 노래를 부른다 / 그 아픔, 그 슬픔, 그 분노 / 이젠 남의 가슴에 떠넘길 거냐고 / 가슴도 아닌 가슴으로 살거냐고 / 스무살의 나를 향해 / 스무살의 너를 향해."(박노해, '스무살의 새벽 노래' 중)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시집, 30주년 개정판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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