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요? 거긴 마을도 아니에요"

등록 2004.12.30 11:38수정 2004.12.3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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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평화롭게.


시골 집 대충 손본 뒤 이삿짐을 싸며 혼자 상상하고 즐거워했던 내 말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상상처럼 처음 둥지를 튼 우리 마을은 따뜻한 남향 볕이 마을을 감싸고, 동네 앞 계단 논두렁엔 억새가 춤을 추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요.

마을 뒷산 옆구리를 흉측하게 파먹은 채석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히 우리 마을에선 시야가 가려있고 더구나 채굴기한이 올 해 말로 끝난다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느닷없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기한이 끝난 그 자리에 사업주가 명의만 바꿔 채석 가공 공장 허가 신청을 다시 했다는 겁니다. 지난 10년간 채석장 때문에 주민들이 받은 피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이나마이트 폭파음과 진동으로 토담집이 흔들리고, 버들치가 노닐던 마을 앞 계곡물은 희뿌연 돌가루와 시멘트 분진이 녹아 아예 회색 물빛이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레미콘 차량과 덤프트럭은 갓길도 없는 도로가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동네 어른들을 사정없이 위협했지요.

채석장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마을은 세 곳이었습니다. 입구의 우리 마을, 그리고 채석장을 거쳐 드나들어야 하는 뒷마을 두 곳. 그 중 제일 피해가 큰 마을은 우리 마을 뒤, 바로 채석장이 붙어있는 옆 마을이지요.


산허리에 가려 채석장이 안 보이는 우리 마을이나 채석장에서 상당히 떨어져 직접적인 피해가 덜한 끝 마을은 남의 동네 불구경하듯 했습니다. 30여 가구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대동단결해 투쟁기금을 모으고 서명운동을 해 군청을 압박하는데도 두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사온 지 2년. 토박이 동네사람들 속에 섞이기는 언감생심이던 나였으니 동네사람들 제치고 혼자 설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장님과 함께 힘을 합쳐 채석장 저지투쟁을 벌이는 옆 마을 청년회장을 만났지요.


그 분은 내 친구의 친구로 이사 온 후 소개를 받아 서로 오가며 가깝게 사는 내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민원실에 낼 서명을 받고 있다는 그에게 우리 동네 사정을 물었더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습니다.

"말도 마세요. 거기는 마을도 아니에요. 아주 의견이 없는 동네라니까요. 거기 이장한테 협조를 부탁했더니 음으로 양으로 채석장 도움을 받는 게 많아 안 된다고 거절합디다. 뭐 노인정 기름값을 채석장이 댄다던가? 그리고 그 동네 사람 둘이 채석장에서 일하고 있잖아요. 하나는 청소하고, 하나는 식당에서 일하고. 노인들에게 직접 사정을 드렸더니 그 사람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어떻게 말리냐고 하시니. 어휴, 쇠귀에 경읽기죠."

끝 마을 사람들도 자기 동네에서 좀 떨어져 있어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서명 참여에 미적미적한다는 하소연까지 들으니 황당함은 둘째 치고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 왔습니다.

선조 대대로 희로애락을 같이 나눴을 순박한 인심들이, 아무리 세태가 각박해졌기로 어찌 이리 망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공동체 정신과 두레정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고개 한번 돌리면 그 집 숟가락 수까지 꾀는 이웃사촌이건만 도시민 버금가는 그 이기적인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실 연일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지역 이기주의 즉 '님비'현상을 볼 때마다 갈등이 많았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시설, 쓰레기 소각장, 화장터, 발전소 등.

전부 다 내 마을은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면 어찌해야 하는지 통 판단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자갈과 모래 역시 인간의 주거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재료입니다. 참말 내 마을에 설치하는 것은 싫지만 납득할 만한 대안 또한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내 고민에 대해 청년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명쾌한 설명을 해주더군요.

"우리 면에는 한번도 민원이 발생하지 않은 채석장이 있어요. 근방에 있는 마을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는 지형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 있는데 뭐하려고 여기다 또 한단 말입니까?"

젊은 사람이 떠나간 농촌, 도시민의 쓰레기 하치장이 되어도 항의할 사람 찾기 힘든 농촌. 지금 농촌은 늙어가다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 사는 마을 역시 마찬가지지요. 마을 인구 90% 이상이 노령인구입니다.

활기가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진 적막한 마을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나로서도 자신이 안 서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나마 은퇴한 도시민들이 찾아들고 싶어 하는 마을로 가꿔야 하는 것이 마을을 살리는 지름길이지 않을까요?

능력도 없으면서 궁리만 많습니다. 주민운동이 혼자 설쳐서 되는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이렇게 특수한 환경에선 자칫 잘못하다간 '너 잘 났다' 찍혀 왕따 되기 십상이란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실정이라 남편에게 상의했더니 혼자 나서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고 반대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최대 공약수. 공 한 개 살짝 건드려 남은 것들을 일망타진하는 당구의 묘미. 목하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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