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政敵)마저 탄복한 인격

이기형의 <여운형 평전>을 읽고

등록 2004.12.30 13:36수정 2004.12.3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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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을 시작으로 식민통치, 민족분단으로 이어진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는 지금까지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상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친일 청산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안고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후 일제 잔재들을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한 과오로 친일반민족 세력들이 다시 득세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우리의 역사는 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변질되어버렸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넘어서서 민족의 자긍심에 타격을 주었고,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반민족세력들의 손에서 우리 역사는 한(恨) 많은 패배주의 역사로 기록되어왔다. 그러나 침략전쟁을 받지 않은 민족과 국가가 얼마나 있었을까. 한 나라의 역사를 평가할 때 중요하게 짚어야할 점은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의의 침략 앞에서 얼마나 지혜롭고 당당히 맞섰는가'이다.

따라서 침략에 항거하여 민족에 헌신한 지도자들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그 민족의 자긍심과 우수성을 높이는데 절실한 작업이다. 바로 '여운형 평전'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여운형의 활동 시기는 크게 상해 망명기, 투옥 후 국내 활동기, 해방 직후 과도기로 나눌 수 있다.

중국 상해로 망명한 여운형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한다.1919년 1월 세계1차대전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한 것이 바로 신한청년당이다. 또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국내외에서 3·1만세운동을 추동 거사케 한 중심세력으로 신한청년당을 지목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실들을 비추어볼 때 신한청년당 대표와 상해 거류민단장을 역임한 여운형의 활동 수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특히 상해시절 여운형이라는 이름을 해외에 널리 떨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1919년 11월 동경에서 일본 정객들과 벌인 담판이다. 상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여운형을 회유해 볼 속셈으로 일본 정객들은 그를 초청한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행을 택한 여운형은 적의 심장부에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일거에 제압한다. 당시 일본이 제시한 자치운동을 반대하고 자주독립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함으로써 그를 회유하려던 일본 정객들을 역으로 설득하고 돌아온 것이다.

여운형을 동경으로 불러들인 일본 척식장관 고가는 회담과정에서 몽양의 인품과 견식과 신념에 감화되어 작별에 임하여서는 몽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서 태어났으면 나도 그대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질렀겠다. 내 계책이 성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대에게 가장 깊은 경의를 표한다."

고가는 여운형이 동경을 떠날 때는 직접 나와서 "여운형 만세!"까지 불렀다고 한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된 여운형은 3년을 복역한 후 조선중앙일보사장, 조선체육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일제 통치 말기 침략자들은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강제 징용·징병 등 대대적인 민족 말살 정책을 편다. 이때 일제로부터 강연과 원고를 강요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친일 협력 인사로 변절하거나, 아예 두문불출하며 은둔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중국이나 미주지역에 거주했다면 최소한 일제의 탄압이나 회유는 면할 수 있어 소신을 지키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민족지도자들을 이용해 청년들을 일제에 협력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단순한 탄압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민족지도자들을 변절시킴으로서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케 하고, 자기 민족에 대한 혐오감마저 조장함으로서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속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운형은 일제에 협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들을 피해 은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정확한 시대통찰력으로 건국동맹, 농민동맹 등 지하조직을 결성해 해방 후를 대비했다. 이는 세계 정세 판단과 일본패망에 대한 확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일제에게 치안을 넘겨받아 미군정이 수립될 때까지 건국준비위원회를 운영하며 치안유지와 과도 임시정부 구축에 온 힘을 쏟는다. 그의 노력 덕택에 해방 직후 무정부상태의 혼란에서 우리 민족은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구성하려는 여운형의 자주적인 노력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편향된 극우, 극좌 세력들은 여운형의 중립적 자주노선을 기회주의로 매도하기 일쑤였다.

여운형에 대해 당시 주한미대사 랭던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이 가급적 빨리 한국에서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라고 평해 그의 정치 노선에 대한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있다.

해방 후 여운형은 수 차례 테러를 견뎌냈지만 결국 1947년 7월 19일 친일반민족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괴한들에 의해 62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만일 반민족행위자들이 하등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사회라면 역사에 대해 누구도 경외감을 갖지 않을 것이며 사회적 정의는 실천되기 어려울 것이다.

여운형은 정적(政敵)들마저 탄복하게 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정치적으로는 편향된 시각을 경계하고 자주적인 노선을 고수한 분이다. 여운형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을 올바르게 평가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사회적 정의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여운형 평전

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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