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아흔아홉골에서 붉은 해를 맞다

등록 2005.01.01 14:56수정 2005.01.0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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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해가 떠오를 동쪽 하늘은 아직 어둠입니다.

해가 떠오를 동쪽 하늘은 아직 어둠입니다. ⓒ 김명숙

새해 첫 해를 맞이하러 어둠을 밟고 칠갑산에 오릅니다.

충남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은 해발 561m로 높지는 않지만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곱가지인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을 뜻하는 칠(七)자와 천체 운행의 원리가 시작되는 갑(甲)자를 쓴 이름을 갖고 있어 예부터 영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청양군은 새해 해맞이 행사를 칠갑산 정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1월 1일 새벽 5시, 집을 출발해 5시 30분 장곡사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칠갑산 산장 쪽에서 출발하지만 조용한 산행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 코스를 이용합니다.

산길로 접어들자 나무들 사이로 동짓달 스무하루 달빛이 길을 안내합니다. 별빛도 더 맑게 빛나고 있어 더욱 아름답습니다. 귓볼을 스치는 바람이 시리긴 하지만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 속 깊이 찬 기운이 들어와 마음을 맑게 헹구어 냅니다.

어둠 속에서 산길을 걸으면 환한 대낮보다 훨씬 빠르게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길을 가는 데 정신을 모으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걷는 동안 주위의 것들이 눈길을 끌어 이리저리 쳐다 보고 그로 인해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흐트러지고 자연 발걸음도 늦어지고 힘들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넘어지지 않고 오직 내 길만 찾아 정신을 한데 모아 목적지를 향해 가게 되지요.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이외의 것들에게 괜히 휩쓸리거나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이 어둔 산길을 걸을 때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a 어둠은 걷히고 미명입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르겠지요.

어둠은 걷히고 미명입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르겠지요. ⓒ 김명숙

아침 7시. 아직 해가 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가슴에 소망을 품고 새해 첫날 첫해를 맞으러 어둠을 뚫고 왔겠지요. 청양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전, 공주, 부여, 보령 등등 인근지역에서도 많은 분들이 칠갑산 일출을 보러 왔습니다.


a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소지를 올리며 무슨 소원을 빌까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소지를 올리며 무슨 소원을 빌까요 ⓒ 김명숙

청양군에서는 군민 안녕과 군정 발전 등을 기원하는 칠갑산 산신제를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소지 종이에 불을 붙여 소원을 빌기도 했습니다.

a 드디어 을유년 첫 해가 구름 사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을유년 첫 해가 구름 사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김명숙

7시 40분. 동쪽을 향해 서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릅니다. 구름 띠 사이로 붉은 해가 손톱만큼 세상을 향해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둥근 해가 되어 솟아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 붉디 붉은 마음이 내게로 옵니다. 순간 가슴이 뜨겁습니다.


a 해를 가슴에 담은 사람들입니다.

해를 가슴에 담은 사람들입니다. ⓒ 김명숙

매일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는데도 우리는 새해 첫날 일출을 남다르게 여깁니다. 환한 세상에서는 늘 익숙해 긴장감이 덜하지만 어둠 속에서 해를 기다리는 동안은 자신을 돌아 보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a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이 젊은 가장의 바람도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이 젊은 가장의 바람도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 김명숙

이제 어둠은 없습니다. 우리를 산 정상까지 안내한 어둠은 우리가 해를 기다리는 동안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a 경기도에서 볼링 전지 훈련을 왔다는 학생 선수들도 일출을 보고 파이팅을 외칩니다.

경기도에서 볼링 전지 훈련을 왔다는 학생 선수들도 일출을 보고 파이팅을 외칩니다. ⓒ 김명숙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은 산 위에서 무엇인가를 다짐하고 빕니다.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사람 사는 모습보다 산이 더 많이 보입니다. 산에 비하면 마을은 한없이 작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사람들만 사는 것인양 아웅다웅 다투며 살고 있습니다.

a 새벽에 칠갑산 일출을 보기 위해 대전에서 왔다는 어린이들 입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비밀이라고 합니다.

새벽에 칠갑산 일출을 보기 위해 대전에서 왔다는 어린이들 입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비밀이라고 합니다. ⓒ 김명숙

a 칠갑산 마니아인 청양의 이 부부 소원도 칠갑산신은 들어 주실 겁니다

칠갑산 마니아인 청양의 이 부부 소원도 칠갑산신은 들어 주실 겁니다 ⓒ 김명숙

내려오는 길에 칠갑산 아흔이골을 앞에 잠시 섰습니다.
칠갑산은 아흔아홉골이 있고 또 아흔아홉 봉우리가 있어 높지는 않지만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많은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이 서로서로 몸을 보태 큰 산 하나를 만든 것이지요.

a 칠갑산의 가장 깊은 곳 아흔아홉골입니다. 이렇게 많은 계곡과 산 봉우리들이 모여 큰 산을 이루었듯이 우리도 서로 서로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을유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칠갑산의 가장 깊은 곳 아흔아홉골입니다. 이렇게 많은 계곡과 산 봉우리들이 모여 큰 산을 이루었듯이 우리도 서로 서로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을유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 김명숙

우리 세상살이도 나 혼자, 우리 가족만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동물과 식물과 땅과 하늘과 그렇게, 그렇게 서로 서로 자기 자리에서 우주를 이루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거기까지 생각하면 이 넓디 넓은 우주에서 내가 막막한 사막의 모래 한알 같은 존재라도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산을 내려오면 그 마음을 나도 모르게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산에 오르게 되는데 갈수록 자주 잊어 버립니다. 칠갑산은 이런 나를 언제나 말없이 받아 주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칠갑산은 충남 청양군 대치면과 장평면, 정산면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금북정맥의 아래 부분에 해당되며 날이 맑으면 동으로 계룡산이 남으로 금강이, 서로 오서산이 가깝게 보입니다. 산 아래 남서쪽 자락에 천년고찰 장곡사가 있으며 장곡사는 대웅전이 두개 있는 절입니다.

덧붙이는 글 칠갑산은 충남 청양군 대치면과 장평면, 정산면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금북정맥의 아래 부분에 해당되며 날이 맑으면 동으로 계룡산이 남으로 금강이, 서로 오서산이 가깝게 보입니다. 산 아래 남서쪽 자락에 천년고찰 장곡사가 있으며 장곡사는 대웅전이 두개 있는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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