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지 못하는 재즈바

무라카미 류의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등록 2005.01.03 09:33수정 2005.01.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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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책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 동방미디어

누구에게나 꿈꾸는 이상향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어떤 사람은 많은 미인으로 둘러싸인 환상적인 시간을 꿈꾸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책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의 모티프는 바로 이 '꿈꾸는 이상향'에서 출발한다.

독특한 소재나 이야기 구성으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무라카미 류의 걸작 중 하나인 이 책은 서술자가 술집이나 음식점 등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란 모두 '좋은 음악이 흐르고 분위기가 환상적인 재즈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그러나 누구도 그 재즈바가 어디 있는지, 어떤 곳인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또한 그 환상적인 재즈바를 꿈꾸는 사람이다. 책의 각 장은 그래서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와 그의 친구, 옛 동료, 혹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이 꿈꾸는 재즈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듯한 모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꿈의 공간을 이야기하면서 인물들은 또 다른 삶의 작은 성찰을 함께 나눈다. 그 성찰은 인생의 의미나 철학적인 사고, 삶에 대한 의문들이다.

춤을 추는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는 쓸쓸한 미국인들은 나이가 들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치크 댄스(볼을 맞대는 춤)를 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젊은이들이 추는 춤, 디스코 댄스는 타인과의 관계가 없는 자기도취라고 단정 짓는다.

"는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가. 누구나 그렇게 가슴을 설레면서 춤을 출 때가 있다. 나는 관계가 오래된 상대와 춤을 춰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건 남자 쪽뿐이고, 거기에 따뜻한 것이 있으면 여자는 몇 살이 되든 함께 춤을 추기를 바랄 것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S는 이제 노부부의 댄스라는 화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 술집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화감독인 하인츠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그 재즈바에 간 적이 있다고 말한다. 발군의 영상 감각을 갖고 있고 뉴욕 다운타운에 수많은 여성 팬을 갖고 있는 하인츠는 여자에 대한 모종의 환멸을 주인공에게 실토한다.


일본 여자는 너무 순종적이고, 중국 여자는 피부가 좋고, 베트남 여자도 좋지만 베트남전의 냄새가 너무 나서 싫다는 둥의 말. 그리고는 자신이 카탈로그에서 골라 결혼한 중국 여자와 헤어진 이유를 그녀가 너무 상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주인공이 하는 위로의 말은 인간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거나 타인에게 배신을 당해 본 적 없이 성장했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상냥한 여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 연애라는 개념은 19세기 낭만주의가 낳은 거잖아. 그래서 그 이전에는 비록 카탈로그라는 게 없었어도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했고,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구. 자네는 그렇게 특이한 결혼을 한 게 아니야. 너무나 모순된 결혼을 한 것뿐이지."


이처럼 인생은 모순투성이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없는 재즈바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만난 누군가는 그 재즈바가 일본 긴자 거리에 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뉴욕에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결국 뉴욕에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재즈바를 찾으러 간다.

"신비주의의 냄새도 풍기지만, 그 재즈바에 간 사람들은 모두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사람들뿐이다. 애초부터 재즈 그 자체가 신비주의와는 거의 인연이 없다. 내가 흥미를 갖고 재즈바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던 무렵, 그거 너 술 취한 사람들의 환상이야, 라고 웃어넘기는 녀석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비웃던 남자들 중 적어도 네 명이 그 후 그 재즈바를 체험했다는 점이다."

그럼 재즈바는 주인공이나 그가 만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공간은 아닌 모양이다. 그가 처음 재즈바를 기억하게 된 것은 바로 아프리카로 간 친구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였다. 그 술자리에서 들은 노래는 감미로웠고 그들의 대화는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의 그는 너무 술에 취한 상태여서 그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마다 재즈바를 이야기하자 그는 결국 재즈바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뉴욕의 한 호텔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꿈을 꾸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고 마침내 그 재즈바에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되짚어 보지만 그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호텔의 웨이터는 재즈바에 대해 묻는 주인공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결국 재즈바에 갔으나 그곳을 다신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

이 소설에서 재즈바는 인간들에게 위안을 주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감미로운 음악과 녹아내리는 듯한 분위기, 편안한 마음. 인간은 누구나 이런 공간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한다. 사실 그런 공간은 우리 현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걸 발견하지 못할 뿐.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발견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공간을 재즈바로 설정한다. 이 공간을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꿈꾸지 않는 자에게 재즈바는 그저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일뿐이다.

만약 우리가 꿈꾸기를 통해 이 낭만적인 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면 현실에서의 답답함 또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재즈바라는 가상의 공간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가상의 공간이 그저 상상에 불과하더라도 꿈꾸는 것만으로 즐겁지 않은가.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무라카미 류, 한성례,
태동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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