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 살았던 북한산 기슭의 내 집, 지금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박도
지난해(2004년) 초가을,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서울 집에 갔을 때 일이다. 내 집은 북한산 비봉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집으로 언저리가 온톤 빈 집 터(개발제한지구)나 산이다.
이른 아침 집 안팎을 청소하는데 옆집에 사는 부인이 인사와 아울러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빈 터에 개가 한 마리 죽어있다고 했다. 당신 남편은 일찍 출근했다면서 나에게 그 처리를 부탁하는 눈치였다.
멀리서 부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흰 개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삽을 들고 가까이 가자 그새 고약한 냄새가 나고 파리들이 들끓고 있었다.
역겨운 생각에 멀찍이서 삽으로 흙을 떠서 10여 번 덮어주자 개의 시신이 모두 흙에 묻혔다. 그리고는 손발을 털고 닦고 안흥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시골집에서 지내는데 문득 문득 개의 무덤이 떠오르면서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흙을 덮어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흙을 몇 삽 더 떠서 제대로 땅에다가 묻어줄 일이지, 무엇이 더러우며 참혹하다고 외면하다시피 멀리서 흙만 몇 삽 끼얹고는 제대로 밟아주지도 않고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던가.
물론 그 개가 살았을 때는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어떻게 그 개의 시신이 거기에 놓인 지도 모른다. 제 발로 와서 죽었는지, 주인이 죽은 개를 거기다가 버리고 갔는지…. 그러나 아무튼 이 세상에서 내가 그 개의 마지막 목격자 겸 땅에다가 묻어주는 이가 된 셈이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처지로 볼 때, 이 세상에서의 뭇 생명체의 죽음은 다 같다. 사람이 죽음이라고 대단하고 개의 죽음이라고 하찮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 때 문인 이규보는 <슬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습니다.”
개의 환영
높은 곳에서 계신 분이 나에게 “기왕에 좋은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무슨 일을 그렇게 소홀히 하였느냐”고 꾸짖는 것 같아서 며칠간 불편하게 보냈다. 그 새 비도 한 차례 내렸다. 혹이나 흙무덤이 비에 씻겨 개의 시신이 드러나지나 않았는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중, 일주일 만에 한 모임의 일로 다시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모임에 참석한 뒤 하룻밤을 서울 집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 삽을 들고 개의 무덤으로 갔다. 내 염려와는 달리 다행히 시신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시 삽으로 흙을 20여 차례 떠서 더 덮어주고 발로 꼭꼭 밟아주었다.
옛날 어른들은 어린 손자들에게 “내 죽으면 무덤을 꼭 꼭 밟아 달라”고 하셨다. 아마도 그 어른들은 그 점이 가장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몹시 어렵게 다녔는데 그때 동창 한 어머니는 늘 나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다. 그러면서 이따금 이런 부탁하셨다. “내 죽으면 네 발로 내 무덤을 꼭 꼭 밟아다오.”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학교에 결근까지 하면서 두건을 쓰고 그 부탁을 그대로 들어드렸다.
아마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이라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관문을 어떻게 지나치느냐에 염려치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