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부터 나는 연탄불 때문에 그만 약속시간을 어기고 말았다이종찬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모두
그래. 그 처녀는 어쩌면 이산 김광섭(1906-1977) 시인의 시처럼 서울의 캄캄한 겨울 밤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는 잔별 중 하나였는지도 몰랐다. 그 숱한 잔별 중 우연히 내 눈에 띈 별 하나, 그때부터 나도 몰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은근슬쩍 찾아냈던 그 희미한 별 하나였는지도 정말 몰랐다.
아마도 그 처녀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처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그 처녀 또한 나를 그저 그렇게 잠시 스쳐가는 짧은 인연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하긴, 그 처녀가 뭐가 그리 아쉽겠는가. 서울에는 밤하늘에 박힌 숱한 별처럼 많은, 아니 나처럼 희미한 빛이 아닌 밝고 찬란한 빛을 내는 별 같은 총각들이 오죽 많겠는가.
그래. 어쩌면 그 때문에 그 처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녁에 만나라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씀을 '다음에' 하면서 미루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막상 현실적으로 나를 받아들이려고 하자 뭔가 캥기는 게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밥집 아주머니께서는 그날 그 처녀가 친구들과 함께 노인정에 가기로 했다는 선약이 있는 줄 몰랐다고는 했지만.
"걔가 겉보기보다는 아주 쑥맥이야. 내 딸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걔가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변변한 남자 친구 한 명 없었다니까. 그러니까 걔를 만나면 총각이 재미 난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될 거야."
"그래도 따님은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촌놈보다야 훨씬 낫겠지요."
"하여튼 첫 단추를 잘 꿰매야 하는 거야. 알았지?"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는 나와의 인연의 끈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인연이 되었으니 그 인연의 끈을 그저 그렇게 섣불리 놓지 말고 더욱 단단하게 조여매자는 그런 뜻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뭐가 아쉬울 게 있어서 봉천동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나를 사위까지 삼으려고 했겠는가.
1987년 1월 1일 저녁, 나는 그 처녀와의 첫 약속부터 그만 늦어버리고 말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날 오후 6시쯤,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리며 마악 집을 나설 시간에 그만 연탄불이 꺼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두들 1월 1일이라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그날 밤까지 덜덜 떨며 밤을 지새기는 정말 싫었다.
그렇다고 요즈음처럼 휴대폰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 내가 살고 있는 달셋방에 전화를 놓을 수 있는 그런 형편도 아니었다. 애가 탔다. 그날따라 성냥불을 갖다대면 이내 칙칙 소리를 내며 최루탄 같은 연기와 함께 잘 타던 번개탄에도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하긴,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이 그리 서둘렀으니 어찌 연탄에 금세 불이 활활 붙을 수가 있었겠는가.
"총각! 내가 연탄불 좀 빌려줄까?"
"그럴 여유가 있어요?"
"오늘 날씨가 하도 추워서 아까 연탄불을 한장 더 피웠거든. 근데, 지금 연탄을 다시 갈려고 하니까 참 애매하네."
"저…정말 고맙습니다."
"그 대신 총각 새 연탄 한 장 내가 가져 가."
"그야 당연하지요."
"근데 오늘따라 총각이 멋을 많이 냈네. 오늘 저녁에 아가씨와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가 보지?"
그랬다. 그 당시에는 연탄아궁이에서 잘 타고 있는(거의 다 탄 연탄이든) 연탄불을 한 장 빌리면 까아만 새 연탄 한 장 내주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 번 꺼져버린 연탄불을 다시 피우기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바쁠 때는 이웃집에서 연탄불 빌리는 것을 아주 예사로 생각했다.
사실, 나는 저녁 7시 탑골공원 들머리에서 그 처녀와 만나기로 했다. 그것도 내가 그 처녀에게 공중전화를 걸어 한 약속이 아니라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께서 미리 정해놓은 약속이었다. 그날 나는 그 처녀를 만나면 탑골공원 옆에 있는 멋진 레스토랑 같은 곳에 가서 저녁을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비프가스 같은 걸 시켜 분위기 나는 저녁을 먹은 뒤 그 처녀와 함께 대학로에 있는 흑맥주집('로즈'였던가 '로제'였던가 이름이 가물가물하다)에 가서 오래 사귄 연인처럼 흑맥주도 나눠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여의도 고수부지에 가서 꽁꽁 얼어붙은 한강물에 물수제비라도 날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래 나눌 참이었다.
"총각! 혹 오늘 집에 못 들어오는 거 아냐?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내가 총각 대신 연탄불 봐 줄 거고."
"아…아닙니다. 서울바닥에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으면 좋게요."
"나도 처음 서울에 올라와 구로공단에서 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막막하기만 했어. 터놓고 이야기 할 친구가 한 명도 없었으니 내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그대로 굶어죽는 줄로만 알았지. 하긴, 지금도 요 모양 요 꼴로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주머니는 방 한 칸이라도 전세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서둘러 연탄불을 갈아넣은 뒤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을 탔다. 그때 시간은 이미 저녁 7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때 문득 국밥집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딸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울 깍쟁이처럼 아주 세련된 것 같지만 속내는 그게 아냐. 그래도 첫 약속이니까 시간을 꼭 지켜'라는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처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7시 30분까지만 도착하더라도… 이대로 간다면 7시 40분쯤 되어야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숍 같은 곳에서 약속을 하는 건데. 그랬다면 공중전화라도 걸어 사정을 이야기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니다. 더 이상 기대를 하지 말자. 5분쯤 기다리다가 그냥 갔을 거야. 첫 약속, 그것도 1월 1일 새해 첫 날 한 약속을 어긴 내가 얼마나 얄밉고 기가 막혔겠는가. 나라고 해도 '에이 재수 없어' 하며 그냥 돌아서지 않았겠는까. 아니, 어쩌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어서라도.
"에이~ 씨! 거 좀 그만 밀어요. 누구는 자리가 넓어서 허수아비처럼 이렇게 가만이 서있는 줄 알아요."
"죄송합니다. 근데 웬 짜증을 그렇게 내세요? 명색이 오늘이 새해 첫 날인데."
"새해 첫 날이라고 해서 정부에서 밥이라도 먹여줍디까?"
지하철 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지하철이 출발하고 역에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바람에 비명소리와 상소리가 마구 뒤섞였다. 그중 가장 얄미운 것은 화장을 이쁘게 한 아가씨가 그 비좁은 공간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껌을 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종로3가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정확하게 저녁 7시 38분이었다. 나는 서둘러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탑골공원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마치 죄를 짓고 달아나는 사람처럼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숨가쁘게 탑골공원으로 걸어갔다.
혹 그 처녀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미안해요. 차가 하도 막혀서…' 아니, 처음부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처녀 또한 내가 지하철을 타고 온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지하철이 어떻게 막힌단 말인가.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연탄불이 꺼지는 바람에…' 아니, 그렇다고 어찌 첫 약속 첫 마디부터 그런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만약 그 처녀가 가버리고 없다면 정말 어떡하지? 그동안 나를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주었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보고. 그리고 그 처녀는 괜히 나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더구나 새해 첫 날 저녁에 보기좋게 미역국을 먹인 나를 얼마나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