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21회)

등록 2005.01.13 11:33수정 2005.01.13 12:08
0
원고료로 응원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발을 움직일수록 온 몸에 붙은 테이프가 더 조여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목에서 나온 소리가 입에 막혀 더 이상 새어나오지 않았다. 눈까지 가려져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온몸이 테이프에 묶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몸을 옆으로 비틀어보았다. 그러자 의자가 흔들렸다.


몸에 힘을 더 주자 의자가 잠시 비틀거리다가 그만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다행히 옆으로 쓰러져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팔목 쪽이 둔탁하게 저려왔다.

의자에 묶인 채 그대로 쓰러졌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상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리를 비웠는가?

하우스 돌프는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박물관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였다. 분명 잠가 놓은 현관문의 손잡이가 스르르 열릴 때부터 주의를 했어야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막 뒤를 돌아보는데 뒤통수에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퍽 무릎이 꺾이며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온 몸이 묶여 있는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도 전해오지 않았다.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가?'


하우스 돌프는 자신을 묶은 사람을 짐작해보았다. 역시 피터 크랴사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대는 중국인? 그럴 가능성이 많았다. 피터 크랴사의 죽음도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그들이 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 아닌가?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뒤에 문 입구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한참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우스 돌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옆으로 세게 흔들었다. 의자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내질렀지만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만 간신히 새어나오는 정도였다. 그것도 지쳐 힘을 놓고 있는데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담배 불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며 발자국 소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사내가 하우스 돌프의 눈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낸 것이다.

처음엔 빛에 익숙지 않아 눈이 너무 아파 왔다. 하여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가 다시 뜨자 주위의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앞에 검은 티셔츠에 가죽 장갑을 낀 사내가 서 있었다. 생각대로 동양인이었다. 중국인이 분명할 것이다.

사내가 다가와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워주었다. 그리고 하우스 돌프의 입에 붙은 테이프마저 떼어주었다.

"많이 답답했겠군."

그것이 사내가 건넨 첫 마디였다. 하우스 돌프는 눈에 힘을 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중국에서 왔겠군."

"역시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네가 당신을 묶고 있는 이유도 잘 알겠군."

하우스 돌프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자 사내가 담배 연기를 위로 내뿜으며 낮은 문어체로 말했다.

"모른다고 말할 처지가 아닐텐데."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것이오?"

"그것의 정체를 우리에게 알려달라는 거야."

"그것이라니? 난 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소."

"우리 중국에서 본 것을 말하는 것이오. 당신이 본 것을 그자에게 알렸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소."

"그 자라니?"

"한국인 교수를 말하는 것이오.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지."

순간 하우스 돌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땀이 뺨을 타고 내리는 것과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간신히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피터 크랴사를 죽인 것도 역시 당신들 짓이군."

"난 당신이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길 원하지 않소이다. 순순히 대답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오."

"난 정말 모른다 말이오. 그 위치만 이야기 해줬을 뿐이오.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소."

사내는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죽은 한국인 교수는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에게만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렸을 것이오."

하우스 돌프는 발악하듯 소리를 높였다.
"정말 난 모른다 말이야."

그의 거센 외침과 반대로 사내는 감정을 억제한 낮은 음으로 한 문장마다 또박또박 끊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이미 두 명의 사람이 죽었소. 당신 하나 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없다는 걸 잘 아셔야 될 것이오. 이래도 말하지 못하겠다 말이오?"

"없는 말을 지어서라도 하란 말이오?"

사내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가늘게 중얼거렸다.
"할 수 없군. 이 모두가 당신의 운명이란 걸 알아두시오."

그러면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한쪽 구석에 놓아둔 플라스틱 통을 가져왔다. 그 통에 든 내용물을 집안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순간 신나 냄새가 풍겨왔다. 불을 지르려는 것이다. 바닥 곳곳에 고여 있는 신나가 하우스 돌프가 앉아 있는 의자에까지 흘러왔다.

"안돼! 안 된단 말이야!"

그렇게 외쳤지만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한쪽 손으로 가져갔다.
"어차피 너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사라져주는 것만으로 우리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지."

"당신은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지?"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 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늘나라에 가면 먼저 온 한국의 안 박사와 너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죽거리던 사내가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순간 불길이 확 번지며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내는 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하우스 돌프를 뒤로하고 천천히 집을 빠져 나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