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나는 얼어붙은 물레방아처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처녀와의 만남에 자신이 없었던 것도 바로 코 앞에 닥친 식의주 걱정 때문이었다이종찬
1987년 1월 1일 저녁 7시 40분, 내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물결처럼 헤집으며 탑골공원 앞에 갔을 때 그 처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목을 기린처럼 쭉 빼고 탑골공원 여기저기를 훑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탑골공원 안도 둘러보고 탑골공원을 두어 바퀴 돌면서 사주팔자를 보는 포장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처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발이 몹시 시리고 귀가 따끔거렸다. 그때 추운 서울의 하늘에 희미하게 박힌 별 하나가 성호를 짧게 그으며 인왕산 쪽으로 툭 떨어졌다. 그날 나는 캄캄한 서울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처음 보았다. 하필이면 그날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 처녀와 나의 인연은 저 별똥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까 그 처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글세방을 나설 때 연탄불이 꺼질 때부터 뭔가 찜찜했다. 근데, 서울의 하늘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별똥별까지 보았으니, 어쩌면 그 처녀와 나와의 인연의 끈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인지도 몰라.
"아저씨! 올해 사주팔자나 한번 봐 주세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여기다 적어. 음력으로."
"여기요."
"어디 보자~, 별은 많이 떴는데 구름이 자꾸 끼어드는구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별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은 많이 만나는데 자꾸 누군가 방해를 해. 재물운이나 애정운도 그리 좋지가 않구먼."
"그래요? 그렇다고 밥까지 굶지는 않겠지요?"
"그럼! 사주팔자는 그저 재미로 보는 것이니까 내 말에 괘념치 말고 열심히 살아."
검은 색과 흰 색이 반쯤 섞인 긴 수염이 멋져 보이던 그 할아버지의 뒷말을 나는 등 뒤로 흘려들었다. 괜히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이야기는 감추고 좀 좋은 이야기만 해주면 어디 덧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마따나 청춘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 그깟 사주팔자에 얽매일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그깟 사주팔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자꾸만 그 할아버지의 말이 귀에 쟁쟁거렸다. 특히 '재물운이나 애정운도 그리 좋지가 않구먼' 이라는 그 말이 자꾸만 거슬렸다. 또한 그 재물운과 애정운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새해 첫날부터 연탄불도 꺼지고 그 처녀와의 첫 약속도 어긋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얄팍한 생각도 들었다.
그날 나는 탑골공원을 서성이며 밤 9시까지 그 처녀를 기다렸다. 그 처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나름대로의 예의였다. 나는 그때 그 처녀가 7시에 왔다가 30분쯤 기다리다가 돌아갔다고 한다면 최소한 그 배가 넘는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처녀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죄… 죄송합니다. 연탄불이 꺼지는 바람에 조금 늦게 나갔더니 그만."
"1시간도 넘게 기다렸다던데?"
"예에? 그날 제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이 7시 40분이었는데요? 그리고 저는 9시까지 탑골공원을 빙빙 돌다가 돌아왔는데…."
"그러고 보니 서로 찾다가 그만 엇갈린 게로구먼. 그래, 이제 어떡할 거야?"
"……."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날 탑골공원에서 그 처녀를 만났다 하더라도 앞으로 자주 만날 자신도 없었다. 사실, 나 혼자만의 식의주도 하루살이처럼 겨우 때워나가는 처지에서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내게 큰 짐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내가 어머니로 부르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딸을 결혼을 앞세워 사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힘에 겨운 큰 짐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없었다. 식의주도, 나의 문학도, 그저 제자리를 뱅뱅뱅 맴돌고 있는 물방개와 같은 처지였다.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이 시린 막걸리만 홀짝홀짝 마셨다. 국밥집 아주머니께서도 그런 내 모습이 몹시 안쓰러워 보였던지 그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렇다고 그 처녀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가 자칫하면 그 처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총각이 내 딸아이를 너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 보자고."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냐, 아냐.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그저 하루라도 빨리 총각을 사위로 삼고 싶었던 내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게지."
"제가 서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 세월에~ 그러다가 내 딸아이 처녀귀신 되고 말게."
그렇게 그 처녀와 나는 헤어졌다. 사실, '헤어졌다'란 말이 맞는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처녀와 나는 꼭 한번 국밥집에서 얼굴만 마주친 뒤 짧은 몇 마디를 나눈 그런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그 처녀를 가끔 떠올리며 어떻게 할까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제법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그 처녀의 소식을 다시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나는 가끔 신림시장에 들렀지만 국밥집 아주머니께서는 따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사실, 어떤 때는 국밥집 아주머니가 야속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가끔 막걸리잔 속에 그 처녀의 하얀 얼굴이 어른거릴 때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신림시장에 들러 은근슬쩍 "따님은 요즘 어때요?" 하면서 국밥집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국밥집 아주머니는 "언제부터 내 딸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아졌어. 벌써 전셋집이라도 마련한 거야?"라며 딴전을 피웠다. 마치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들면 뭐해' 하는 그런 투였다.
"저, 다음 달부터 다른 곳으로 갈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 이사라도 간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학습지 구역을 한번 바꿔보려고요. 대치동하고 잠실 쪽에서 학생 소개가 자꾸만 나와서요."
"그럼 여기 학생들은 어쩌고?"
"그래서 고민 중입니다. 혹 따님이 다른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한번 맡아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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