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무릎 꿇린 '보험설계사의 힘'

'2단계 방카슈랑스' 연기 가닥... 은행 '허탈'-보험사 '희색'

등록 2005.01.14 12:08수정 2005.01.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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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부와 여당이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연기를 결정한데는 보험설계사들의 힘이 컸다. 지난해 말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

정부와 여당이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연기를 결정한데는 보험설계사들의 힘이 컸다. 지난해 말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 ⓒ 사무금융연맹

정부와 여당이 논란을 빚어온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을 부분적으로 연기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초 오는 4월 2일부터 시행하기로 돼 있는 자동차보험과 종신보험, CI(치명적 질병) 등에 대한 보장성 보험의 은행 창구 판매를 정부와 여당이 전면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에 대비, 수백억원을 들여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온 은행업계는 울상을 짓고 있는 반면, 보험업계는 희색을 띄고 있다.

정부 "2단계 방카슈랑스 일정 및 종목 조정 중"

13일 현재 재경부와 열린우리당은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과 관련, 당초 계획했던 시행 일정과 종목을 실무적으로 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재경부 관계자는 "현재 2단계 방카슈랑스의 시행 일정 및 종목의 조정을 검토중"이라며 "다만 정확한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도 "우리당 우제창 의원 등이 의원입법안으로 발의한 내용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예정된 2단계 방카슈랑스를 있는 그대로 실시할 수 없게 됐다"며 "전체를 연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상 종목 중) 상당부분은 연기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의원은 "아직 어떤 종목을 연기할 것인가는 실무자 선에서 논의 중"이라며 "자동차보험 같은 것은 연기하자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내용은 2단계 방카슈랑스를 계획대로 시행하되, 대상 종목 중 자동차보험이나 종신보험 등은 오는 2008년에 은행 창구 판매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2단계 방카슈랑스는 사실상 도입하나 마나한 제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은행업계는 울상을 짓고 있다. 특히 각 은행들은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이 연기될 경우 그 동안 만들어 온 수백억원의 소프트웨어 개발비용이 고스란히 날아갈 처지에 놓여 한숨만 쉬고 있다.


은행연합회 실무자는 "각 은행들이 방카슈랑스 도입을 위해 투입한 소프트웨어 개발비용은 작년 11월말 기준으로 약 250억원에 달한다"며 "도입이 연기되면 이 비용은 그대로 물거품이 될 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정부의 도입 연기 소식을 듣고) 허탈한 심정 뿐"이라며 "은행이 아무리 호소해도, 정치권이나 언론 어디서도 우리 얘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반면 보험업계는 정부와 여당의 결정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손보협회 한 관계자는 "보험사의 최종 요구는 2단계 방카슈랑스의 도입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연기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이상 일단 추이를 지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 "대량 실직" 주장 주효... 은행 불법행위도 '자업자득'

이처럼 정부와 여당이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과 관련한 입장을 선회한 것은 무엇보다 보험설계사의 대량 실직이나 영세 보험대리점이 입을 타격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보험업계가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반대'의 이유로 대량 실직 문제를 내세운 것이 매우 주효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을 예정대로 추진한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헌재 부총리 등도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에 사활을 건 보험업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보험설계사들과 보험사노조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보험사와 보험설계사들, 노조는 지난해 말 정부과천청사와 시청 앞 등에서 수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일부는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이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보험설계사들의 이 같은 조직적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은행업계를 따라 갈 수 없었던 보험업계가 결국 은행들을 무릎 꿇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보험설계사들의 힘'이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모두 보험사들의 편을 들고 나선 것도 사실은 보험설계사들의 조직적인 반발 때문"이라며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관리나 선거 때의 표를 의식해 무리하게 보험사들의 편을 들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러나 은행들도 무턱대고 보험사들 탓만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1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이후 대부분의 은행들이 불법행위를 통해 보험시장을 잠식해 왔기 때문이다. 방카슈랑스 도입 이후 각 은행들은 금융감독법상 불법으로 규정된 '꺾기'(대출 등을 이유로 보험 가입 강요)를 중단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은행들의 보험 판매 실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가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연기를 결정한 배경에는 은행들의 불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던 탓도 크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자업자득'인 셈이다.

이처럼 정부와 여당이 2단계 방카슈랑스 도입 연기를 결정해 단기적으로는 보험업계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정부는 연기된 기간 내에 보험업계의 강력한 구조조정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계안 의원은 "방카슈랑스 도입은 이미 세계 금융권의 대세이자 조류"라며 "현재 20여만명에 달하는 보험설계사들도 적정수준으로 구조조정이 돼야 하는 만큼 일단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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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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