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입국 스웨덴 기자가 본 '100년 전 한반도'

[서평]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등록 2005.01.16 19:42수정 2005.01.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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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0년 전의 한반도 상황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현재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1990~1992년에 전6권의 전작으로 발표한 대하소설 <애니깽>을 쓸 때, 나는 마치 1905년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조선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에 있는 애니깽 농장으로 노예 이민을 떠난 것이 1905년이었기 때문에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시절 조선인의 외양과 내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회 상황, 생활 풍경이나 인물 묘사를 할 때 당시의 한반도 사회상을 담은 풍속서나 사진자료집을 많이 참조하였는데, 그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책이 최근에 완역판으로 나왔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다.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a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표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표지 ⓒ 책과함께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이 완역판으로 나왔으니, 대하소설 <애니깽> 개작판 <애니깽 노예농장>을 준비중인 나에게는 '노예 이민을 떠나야 할 만큼 굶주린 한반도 사회상'을 그리는 데 보물처럼 귀중한 자료로 다가온 셈이다.

나처럼 팩션(팩트+픽션) 경향의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에게는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라는 서양인의 시대관찰기가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본에 나라를 약탈당하기 시작하는 때의 조선 상황을 다각도로 알아보는 데 이 책이 매우 소중한 간접체험서가 될 듯하다.

스웨덴의 신문기자인 아손 그렙스트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사연부터가 흥미롭다.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도쿄에 입국했는데, 일본이 한반도 취재를 금지해 버렸다. 그래서 감행한 것이 영국인 무역상 위장 밀입국. 밀입국에 성공하여 1904년 12월 24일에 부산항에 도착한 아손 그렙스트는 1905년 초까지 한반도를 두루 여행한 뒤 1912년에 스웨덴에서 < I KOREA >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펴냈다.

그는 한반도에 체류하는 동안,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서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고하(高下)에 관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사진기가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이유로 사진 찍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사람이 많던 그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이들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아 그 중 140여 장의 사진을 골라 책에 실었다. 사진만 있다면 사진집에 그치고 말 일인데,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유창하고 시원한 필력은 아주 재미있는 여행기를 탄생시켰으며 책의 값어치를 더 높여 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웨덴에서 출판된 책이라면 한 권도 빠짐없이 구입하여 소장한다는 스톡홀롬의 왕립 도서관 장서 목록에도 빠져 있다는 < I KOREA >. 이 책을 출판한 엘란데르출판사는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데다 몇 군데 고서점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 I KOREA >.


이 책을 옮긴 김상열(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가 스웨덴에 유학 가 있을 때 스톡홀름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사서 유재호씨(재 스웨덴 교포)가 처음 소개해 주었던 < I KOREA >. 결국 유씨 소유의 (스웨덴에 단 한 권 남아 있을지 모를) 책을 빌려 일시귀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984년 당시에 이 희귀한 원서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으며, 그 해 8월부터 월간지 <마당>에 연재되었고, 1986년에 '도서출판 미완'에서 <코레아 코레아>라는 제목으로 처음 한국어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번역에서 제외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아쉽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근 2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도서출판 책과함께'의 도움으로 완역서를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의 키가 얼마나 작았는지('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를 잘 보여주는 단락이 있다.

일본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컸으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키가 컸고 체격이 우람했으며, 이미 주지한 바 있는 그들의 자유롭고 품위 있는 태도는 실제보다 그들을 더 커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는데 이 시선에는 일종의 존경이랄까 번민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57쪽에서

하지만 일본인보다 키가 크다고 모든 면이 낫다고는 볼 수 없는 법. 우리 나라의 부실건축은 요즘도 늘 골칫덩이지만, 그 시절에도 부실건축 만들기는 습관처럼 빈번하였던 모양이다.

코레아의 시골에서는 다리를 튼튼하게 짓지는 않는다. 좁은 데다 난간조차 없다. 이 다리들은 보통 약한 재목 위에 가는 막대와 지푸라기 그리고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진흙으로 덮어 만든다. 봄과 가을에 간단하게 수리를 해 파인 구멍 등을 메운다. 그러나 보수 공사라고 해야 보잘것없이 아무렇게나 하기 때문에 비만 한 차례 쏟아져도 무너지기 일쑤다.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50~51쪽에서

책 읽지 않는 요즘 한국인의 모습 역시, 그 시절의 습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한 단락도 있다.

코레아는 풍부한 소설 작품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신기원을 여는 소설가는 배출하지 못하였다. 1천여 작품을 상회하는 대중소설은 인기가 높다. 특히 그 내용 면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은 더욱 인기가 좋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소설은 주로 중산층 가정의 여자들이 읽는다. 하층 계급은 거의 독서를 하지 않는 편이며, 상층 계급은 좀더 귀족적인 문학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대개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160~161쪽에서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책 사볼 돈도 없다네"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책읽기를 강요하는 일부 중산층 사람들, 한글을 배웠으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내려놓는 꼴이 되니 얼마나 기이한가.

이 책에는 유방을 내놓고 물동이를 인 채 걸어가는 젊은 여성 사진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설령 아손 그렙스트에게서 돈을 받은 뒤에 가슴을 내놓고 찍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1980년대 초에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내버스 안에서 유방을 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젊은 여성을 더러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아손 그렙스트가 고종 황제와 황태자를 만나는 장면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스러워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매었다.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지만 노란색 옷차림에 서양의 나이트 캡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상냥한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중략)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입술은 두꺼워 육감적이었고, 코는 납작했으며, 넓은 눈썹 사이로 주름살이 움푹 파여 있었다. 노란 두 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빡거리면서 한시도 쉴 새 없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218~219쪽에서


그의 눈에는 황제와 황태자가 모두,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후덕함까지 상당히 결여되어 있는 모습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나 '찡그린 돼지의 면상'에 비유하였으니, 외모를 보고 어지간히 실망하였던 저자의 내면을 읽을 수가 있다. 이런 식이라면, 침략 귀신이 씌워진 일본에는 더욱 얕잡아 보였을 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경꾼인 스웨덴 기자의 폄훼 시각이 선입되었을 터, 압록강 북쪽을 무대로 러일전쟁이 곧 밀어닥칠 상황에서 여러 외국 대사와 고위관리들을 만나는 고종 황제와 황태자의 내면이 기분 좋고 침착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조선 농부 세명이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데 대한 항거의 뜻으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당하는 현장 사진이 들어 있다. 시체를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그 시체는 엿새 동안 버려져 있다가 독수리와 육식 조류들에게 얼굴을 파먹혀 신분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우리 것을 제멋대로 빼앗고 거기에 항거하는 조선인을 제멋대로 총살하는 일본을 용서하기는 어려운 한편, 그렇게 망국(亡國) 직전에 이른 우리네 자신의 인권 박해 상황을 돌아보노라면 '저것이 우리네 조상의 모습이었던가' 가슴이 서늘해진다. '일본인보다 우리는 덜 비정하다'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조선의 형 집행자가 조선의 죄인을 사형(死刑)에 처하는 끔찍한 사진과 묘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죄수가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반주검이 되도록 볼기를 맞는 장면, 주리를 틀자 다리뼈가 부러지고 으깨어져 기절해 버리는 장면들이 사진으로 선명하게 나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절하였다가 깨어나자마자 대막대기를 집어 넣어 뼈를 부러뜨리고는 아예 비단 끈으로 목을 졸라 죽여 버리니, 이보다 잔악한 장면이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총살 당해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일본인은 우리를 얕잡아 보고 우리를 침략하여 괴롭혔지만, 우리는 스스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랑하여 타민족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우리네 민족 자신을 처절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던가.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비정했지만, 조선인은 조선인 자신에게 비정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일본의 앞잡이가 생겨났고 나라를 팔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1905년 봄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 가던 다양한 신분의 조선인 1000여명이 '지상천국'이라는 꾀임에 속아 멕시코의 가시 투성이 용설란(여러 가닥의 잎이 용의 혀를 닮은 식물)인 애니깽(에네켄) 농장으로 노예처럼 팔려 넘어간 사건만 해도 그랬다. 고종 황제도 몰랐을 정도로 외교의 수장은 엉터리였고, 일본 외무성의 지시를 받아 기왕에 메리다의 애니깽 농장에서 고생하던 일본인을 바꿔치기하여 조선인을 대신 팔아넘긴 일본인 인신매매범 오바 가니치 곁에는 바로, 출세에 눈이 어두운 조선인 앞잡이가 있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말에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주목적이었던 러·일 전쟁의 전선 취재를 접어둔 채 인천 제물포에서 강제 출국 당하는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 그는 불과 한달여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부지런히 한반도를 돌아다녔던 셈이다. 그가 한반도에서 떠난 그 해 2월에 시작된 러일전쟁은 9월의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마감되고, 그 해 11월에는 강제로 을사조약이 맺어지며 치욕의 한일합방을 예고한다.

100년 전의 슬픈 한반도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취재하여 여행기로 남겨 놓은 아손 그렙스트는,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에 머물렀던 만큼 한국사와 인물, 조선 풍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이 부분은 괄호 안에 옮긴이가 하나 하나 지적해 놓음으로써 읽는이가 되도록 오류를 피해 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러면 그 중대한 예식이 거행될 신랑의 집(여기서 저자는 신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바꾸어 말하고 있음-옮긴이)을 살펴보기로 하자. -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190~191쪽에서

역사책을 참 잘 만드는 출판사를 대할 때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이 나올까 기대되기도 한다.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라는 부제가 붙은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묵직한 책의 무게 만큼 내용도 묵직한 <무측천 평전>,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한·중·일 역사소설의 대가 3인(김달수·진순신·시바 료타로)이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는 대담집 <역사의 교차로에서> 등을 펴낸 '책과함께'가 바로 그런 출판사다.

덧붙이는 글 |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아손 그렙스트 쓰고 김상열 옮김/2005년 1월 5일 책과함께 펴냄/384쪽/값 1만4800원

덧붙이는 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아손 그렙스트 쓰고 김상열 옮김/2005년 1월 5일 책과함께 펴냄/384쪽/값 1만4800원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책과함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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