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00회

등록 2005.01.18 08:05수정 2005.01.1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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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간단하게 인사를 받고 나서 장안루의 좌중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예의 그 맑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대주는 철혈보의 독고좌(獨孤佐)이외다. 본 보에 일이 생겨 피치 못하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여러 무림동도와 고인(高人)들의 주흥(酒興)을 방해하게 되었소이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말투는 전혀 비굴하지 않으나 최대한 좌중에 대해 공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투구 사이로 언뜻 비치는 눈빛도 맑고 깊다.

“허나 일각도 못되어 물러날 것인즉 이곳에 계신 분들께서는 전혀 개의치 마시고 즐기시기 바라오. 다만, 너무 지나친 관심으로 혹여 본 보의 일에 간섭하게 된다면 본 대의 혈폭비(血爆飛)에 눈이 없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길 간곡히 바라오이다.”

말은 조리 있고 정중한 말이었지만 일종의 경고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정중히 포권을 취한 뒤 금적수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사(秀士)께서 왜 이리 큰 실수를 하셨는지 소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소. 더구나..”

철혈대주 독고좌는 말을 중간에서 멈추며 금적수사 지광계의 얼굴에서 인피면구(人皮面具)를 떼어 냈다. 매미 날개 같이 얇은 것이었지만 주름살이 가득한 촌노의 얼굴이 사라지며 갑자기 훤앙한 사십대 후반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들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런 정도로 본 보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면 지형(池兄)답지 않은 행동이오.”

독고좌의 탄식 어린 말에 금적수사 지광계는 처연한 미소를 띄웠다. 그의 얼굴엔 이미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회한(悔恨)이 묻어 나왔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한 죄인가 보오.”
“사랑한 것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본 보 누구나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묵인하던 것 아니오? 문제는 마지막 그 어리석은 결정을 왜 했느냐는 것이오.”

그 말에 지광계는 고개를 돌려 촌부의 아낙으로 보이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선택한 여인이었고, 그녀를 위해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후회는 하지만 똑같은 일이 있어도 그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할 것이다.

“대주! 자신의 가문(家門)을 몰살시킨 철혈보에 이 우형(愚兄)의 아내가 달리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소? 아내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이 우형의 책임이오.”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철혈보 내에서 서로가 인정하고 마음이 통했던 지광계다. 무공만을 위하여 살았던 독고좌에게 지광계는 참으로 멋스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씻을 수 없는 크나 큰 죄를 지었다. 정이 있다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다.

“소제를 용서하시오.”

말과 함께 독고좌의 손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금빛 기류가 지광계 부부에게로 쏘아져 갔다.

“헉....!”
“아....!”

짧은 비명이 두사람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고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솟구쳤다. 온몸의 공력이 산산히 흩어지고 있다. 평생 쌓아 온 공력은 무인에게 있어 생명과 같다.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단전(丹田)은 이미 독고좌의 한수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공무를 수행하는 몸이니 수사께서도 소제의 무례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독고좌는 애써 지광계의 시선을 외면하고 여인의 상의를 잡고는 부욱 찢어 버렸다. 목까지 여민 옷깃이 뜯어지며 티 한점 없는 하얀 살결의 어깨가 드러났다. 겉옷은 촌부(村婦)들이 입는 마의였지만 속옷은 자수(刺繡)가 놓인 나삼의다.

“악--!”
“어차피 보(堡)에 가서 치죄(治罪)해도 될 것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여인의 비명과 함께 그 모습을 본 지광계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처음으로 노기 띤 고함을 질렀다. 허나 그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고좌는 가슴을 가린 여인의 속옷마저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목 부위와는 달리 드러난 그녀의 상체는 순백의 뽀얀 살결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신보다 좌중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청색의 천이었다. 모습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용의 문양(紋樣)이 꿈틀거리고 있는 젖가리개 대용의 천.

“으....음...”
“꿀꺽---”

좌중의 나직한 침음성과 함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드러난 살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천에 대한 욕구였다. 독고좌는 거침없이 여인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천을 떼어 냈다. 여인의 복숭아처럼 탐스런 가슴이 출렁거리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흔히들 여인의 아름다운 가슴을 표현하고자 수밀도(水蜜桃)란 말을 사용한다. 그녀의 가슴은 왜 그리 표현되는지 충분했다.

하지만 독고좌는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그의 뒤에 서 있는 두명의 수하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간의 정을 보아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자신의 지위와 책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리라.

“철혈보의 중죄인(重罪人) 금적수사 지광계와 그의 아내 마봉옥(馬鳳鈺)을 포박(捕縛)하라.”

그 말에 그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는 두명의 수하는 물론 철혈쌍비라 불리운 두명의 남녀까지도 부복(俯伏)함과 동시에 외쳤다.
“존--명--!”
마치 한사람이 외치는 듯 그들의 외침은 똑같았다.

그리고 철혈쌍비 중 여인이 상체가 드러난 지광계 아내의 상체를 가려 줌과 동시에 가는 은사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혈보의 전통적인 죄인 압송 의식(儀式)이다. 이미 점혈이 되고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그들은 도망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하지만 죄인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철혈대주 독고좌는 좌중을 쭉 훑었다. 장안루 안에 있는 인물들의 눈에는 탐욕이 어려 있고 그 시선은 한결같이 자신이 들고 있는 천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가 그러지 않으랴! 그는 왜 보주가 자신을 직접 보내고 왜 이것을 처리하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그 천을 펼쳤다. 한 끝에 수실이 달려 봉(棒)에 묶을 수 있는 길이 넉자, 폭이 석자인 깃발이다. 다섯마리의 용이 비상(飛上)하듯 생생하게 수놓아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분들도 짐작하듯이...”

독고좌의 시선은 여전히 좌중을 훑고 있었다. 투구 속에서 쏘아져 나오는 정광은 눈빛을 마주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할 정도였다.

“이것은 오룡번(五龍幡)이외다. 이것과 관련하여 본 보의 보주(堡主)께서는 무림동도들께 이런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이다.”

오룡번. 그것은 전설도 아니었고, 허상도 아니었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찾아 헤메게 하는 그것이다. 탐욕의 눈빛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짙어져 갔다.

“오룡번은 분명 구마겁(九魔劫)을 종식시킨 다섯 분의 기인들이 남긴 유학이 담겨 있으나, 그 분들의 유학은 완전치 못하여 종극에는 미치광이가 되는 폐단이 있다 하셨소. 그에 따라 보주께서는 이 참에 이것을 없애라 하셨소.”

좌중의 인물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런 미친 소리를 어떻게 맨 정신으로 하느냐는 표정들이다. 설사 미치광이가 된다 하더라도 천하제일좌(天下第一座)에 앉아 보고 싶은 게 무림인들의 생리요, 솔직한 심정이다. 더구나 한때 천하제일인이란 명성을 얻었고, 그로 인해 현재까지도 무림에서 최고의 문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철혈보를 세웠던 철혈대제 독고수광이 오룡번을 얻었으리란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가 이룩했던 천하제일인이란 권좌를 누린 후에 설사 미치광이가 되면 어떠랴.

그 때였다. 철혈대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던 좌중에서 불만에 찬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흐흐.... 오룡번의 무학을 익히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말을 어떻게 믿소? 또한 이미 철혈보의 뿌리가 오룡번의 무학일진데 독고대주나 금적수사가 미쳤다고 할 수 있겠소? 철혈보는 이미 오룡번의 무학을 독차지하고 이제는 무림동도들의 눈을 가리려 하고 있구려.”

말을 한 인물은 탐욕이 가득찬 얼굴로 뚫어져라 오룡번을 보고 있는 전독마조(電毒魔爪) 척응(慽膺)이었다. 적령추살(狄靈錘殺) 도삼득(淘三鍀)과 같이 앉아 있는 그는 어떻게든 오룡번을 차지해 보겠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채 좌중의 인물들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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