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MP3와 영화는 우리에게 축복일까?

수용자 처지에서 접근하는 저작권법 이야기

등록 2005.01.18 14:23수정 2005.01.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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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된 저작권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보통 이러한 저작권법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이성적인 접근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조금 감성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필자 주>

a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 GISÈLE FRE

발터 벤야민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다. 그는 이미 1936년도에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이라는 명저에서 현대 예술의 대중화에 따르는 문제점들을 지적해서 꾸준히 사람들에게 인용되는 학자다.


그는 '기계복제시대'의 도래에 따라 예술작품의 복제가 쉽게 가능해지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예술작품은 그 고유한 가치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즉, 사진이나 영화같이 새롭게 등장한 예술장르들은 수없이 복제되고,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분위기(아우라)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좀 어려운 이야기였나?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는 복제가 쉬워지면 쉬워질수록, 그리고 복제된 상품이 원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고유한 가치를 잃어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귀족들의 호사를 위해 존재했던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누구나 만원 미만의 돈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영화표와 음악 CD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봐도 대량복제가 그리 나쁜 결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명확하다.

평생 제대로 된 예술작품 한 번 볼 기회가 없었던 조선시대의 민중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엄청난 예술 혜택을 훨씬 저렴하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 처지에서 바라본다고 해도 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몇 명의 귀족 후원자가 비싸게 예술작품을 사는 것보다는 적은 돈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지불한다면 그 금액도 훨씬 크고, 더 많은 예술가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창작물들이 무료가 된다면? 그 때부터는 예술가와 감상하는 이들 간 처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감상하는 이들이야 저렴하다 못해 아예 무료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생산하는 이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예술가는 창작 의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쏟아질 수많은 반론들이 들리는 듯하다. 정당한 대가가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선 거간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가장 큰 목소리일 것이고 일부는 진정한 예술은 돈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대에 예술 역시 당연히 상품의 영역으로 포섭되기 마련이고, 유통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덧붙여 창작자 역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인정해야 할 현실이며,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저작권법을 반대하는 논의들은 이러한 구조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일부 게시판의 'CD불매'논리는 농민들에게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므로 우리 농산물을 구입하지 말자는 논리와 하등 차이가 없다. 정말 대안을 제시하려면 불매가 아니라 농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하자는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작권법에 대해 정말 문제제기를 하려면 규정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창작자의 지분을 높이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전개된 것이므로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무료로 예술작품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 감상자, 수용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걸까?

나 역시 한 때 MP3로 CD를 구워 음악도 들어봤고, DIVX라 불리는 파일들도 몇 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왜? MP3는 음악감상이 아닌 그냥 귀에 들리는 배경음악일 뿐이고, DIVX는 10여분 지나고 재미없으면 바로 정지시키고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음악과 영화를 흡사 인스턴트 식품처럼 취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러 장 사고 싶은 CD중 한 개를 고민끝에 선택해 귀에 인이 박히게 듣고, 보고 싶은 영화들 중 고르고 골라 하나를 선택해 보고 나오면서 내 선택에 풍만한 행복감을 느끼던 경험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창작물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창작물의 가치는 가격 이상으로 빨리 하락하고 있다.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그 아우라를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이러한 공유의 범람은 다양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다. 당장 지하철을 타면서 사람들이 듣고 있는 MP3 플레이어속의 음악 리스트를 작성해 보라. 아마도 70% 이상이 겹칠 것이다.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영화들의 목록을 보라. 거의 예외없이 최신 흥행 대작들일 것이다.

정말로 국내에선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을 구할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강화된 저작권법을 항의하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 국내에선 개봉, 출시되지 않은 미지의 명작영화들을 볼 기회를 앗아간다고 항의하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

과연 수많은 MP3와 DIVX 더미속에 묻힌 네티즌들은 과연 예술적인 충만감을 느끼고 있을까? 예전에 손을 떨며 지갑을 열어 겨우 CD 한 장 사고, 영화 한 편 보던 수용자들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더 소양있는 사람들이 된 걸까? 이런 네티즌들에게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그의 일생을 바꿀 최고의 노래, 최고의 영화가 존재하기나 할까?

이건 정말 아니다. 예술작품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한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중세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엄청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적절한 수준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창작자에게만이 아니라 수용자들에게도 자신이 소유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높여준다.

그 적절한 대가조차 아까운가? 영화 한 편은 친구와 먹는 맥주 한 병 값도 안 된다. 시디 한 장은 그 맥주 안주 한 접시 값도 되지 않는다. 술자리에선 술값 몇 만원을 호기좋게 계산하면서 집에선 MP3 한 곡 값인 몇백원이 아까워 인터넷을 몇시간씩 찾아 헤매는 세태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긴 방과 후나 퇴근 후에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지 않고 집에 가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이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술값 십만원 '쏘면' 친구들에게 칭찬듣지만 공연 관람에 십만원을 썼다고 하면 '돈이 남아도냐'는 이야기를 듣는 세계 술소비 1위의 나라에서 창작물이 제 대접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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