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건 '풍경' 아닌 '마음'

[책읽기가 즐겁다 117] 사진책 <김기찬-잃어버린 풍경>

등록 2005.01.19 14:55수정 2005.01.1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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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번이고 다시 보는 즐거움

사진책이나 그림책은 값이 퍽 비쌉니다. 비싼 만큼 이런 책을 살 때는 몇 번이고 망설입니다. 참말로 살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살피고 또 살펴요. 그래서 '아, 이 책에 실린 사진과 그림은 돈 얼마를 내고 장만할 만하다'라고 느끼는 그때 비로소 삽니다.


책값이 비싸서도 그렇지만, 온돈 주고 살 만한 사진책이나 그림책은 몇 번이고 다시 볼 만합니다. 처음에 살 때도 몇 번씩 보면서 살피지만, 사고 난 뒤에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술자리에도 들고 나가서 사진을 좋아하는 동무들에게 보여주면서, '녀석들아, 만날 술만 마시지 말고, 이런 책도 좀 사서 보라구'하고 빌려 줍니다. 그렇게 빌려 주고 술 한잔 기울이면서 다시 봅니다. 나중에 책을 돌려받은 뒤 다시 한 번 찬찬히 책장을 넘깁니다.

사진책이 글로 된 책과 크게 다른 대목은 이런 데에 있어요. 사진을 보며 군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무어라 따로 풀이를 덧붙이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처음 볼 때와 두 번 볼 때, 열 번쯤 볼 때와 백 번쯤 볼 때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여러 달 지난 뒤 다시 볼 때, 한두 해 지난 뒤 다시 볼 때도 새삼스럽습니다.

a 겉그림입니다. 수수하게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모습일 텐데, 우리는 수수한 모습은 버리고, 잠깐 동안 멋져 보이는 모습에만 이끌려 가지 싶어요.

겉그림입니다. 수수하게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모습일 텐데, 우리는 수수한 모습은 버리고, 잠깐 동안 멋져 보이는 모습에만 이끌려 가지 싶어요. ⓒ 눈빛

<2> 언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멀리서 아파트가 쳐들어오고 있었다. 새벽 별이 지면 동이 트던 동산도 아파트에 가려졌다. 해 지던 서산은 괴물 같은 기계덩어리가 깔아뭉개 버렸다. 나는 그날 망부석의 소리 없는 죽음을 보고 잠실 주변이 도시화해 가는 모습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더군다나 서울 88올림픽이 결정된 후 그 속도는 더해 가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변하고 사라질 것인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존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 <머리말>

제가 일하는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쪽에는 아파트가 없습니다. 차를 타고 십 분 남짓 나가는 음성 시내에는 아파트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짓다 만 아파트도 여러 채 있고, 짓다 만 아파트 옆에 새로 짓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사십 분쯤 차를 달려 충주 시내로 가면 새로 짓는 아파트가 꽤나 높고, 이미 있는 아파트도 퍽 높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서 창 밖을 내다보면 서울이 가까울수록 아파트 층수는 높아지고, 아파트 동도 빽빽하게 붙어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아파트를 보면 끔찍합니다. 저 아파트가 50년이고 100년이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리에게 살가운 보금자리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길어야 30년이고, 보통 20년마다 '재개발'이라고 해서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거든요.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는 부동산이거나 투기대상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살림집이라면 못해도 서른 해는 있어야 할 테고 쉰 해나 백해쯤은 거뜬히 버텨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이 온통 아파트 천국이 되어가는 요즘 세상, 이런 세상에서 김기찬 님 사진책 <잃어버린 풍경>을 만났습니다. 아, 김기찬님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아파트를 보며 끔찍함을 느끼셨군요. 그래서 이런 사진도 찍으셨군요.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과 <역전 풍경>이란 사진책을 보면서 "언제 이런 사진을 다 찍으셨나?" 싶어서 놀랐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로 찍는 사진과 '골목안 풍경'을 찍는 사진으로도 필름 값이 많이 들고 바빴을 텐데…. '골목안 풍경'을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이 오롯이 <역전 풍경>으로도,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으로도 이어졌구나 싶습니다. 나아가 <잃어버린 풍경>으로도 옮아와 우리가 살아가는 삶터를 돌아보고 찬찬히 짚어 보게 해 주지 싶어요.

<3> 아름다움을 잃은 우리들

"서울 주변의 농촌 마을을 자주 찾아 다녔지만 소사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었던 것 같다. 소사역 앞에서 큰길을 가로질러 논두렁길을 따라가면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쳐진 산기슭에 복사골이 나온다. 따스하고 윤기 나는 햇살에 진분홍빛 복사꽃이 온 동네를 울긋불긋 수놓은 봄이면…. <16쪽>" 하고 이어지는 글은 수필 한 편과 같습니다. 아니 수필입니다. 이렇게 쓴 수필 그대로 사진 한 장을 담습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마음이 화사해지곤 했다.<16쪽>"는 느낌을 혼자만 간직하기 아쉬워 사진으로 담습니다.

긴 돌담 꼬리를 따라가면 또 돌담집이 나오고, 울안에 대추나무 있는 돌담 집을 돌아서면 감나무 돌담집이 나오고, 감나무 돌담집을 따라가면 오동나무 한 그루 서 있는 돌담집이 나온다. 겨우내 움츠렸던 추위가 뒷걸음질치더니 어느새 봄은 곱게 단장한 새색시의 고운 치맛자락처럼 돌담마을에 사뿐히 찾아왔다. 돌담길을 따라오다 마주친 작은 소녀가 나에게 화사한 봄빛 미소를 지어 보였다.<22쪽>

이런 돌담길은 사진을 찍은 '하남시 춘궁동(고골)'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서울에도 서울 가까이에도, 하남에도 수원에도 평택에도 대전에도 부산에도 상주에도 영암에도 서귀포에도 있었어요. 이제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말입니다.

a 김기찬님이 돌담길에서 만난 소녀를 담은 사진입니다. 저는 사진책 <잃어버린 풍경>에서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김기찬님이 돌담길에서 만난 소녀를 담은 사진입니다. 저는 사진책 <잃어버린 풍경>에서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 김기찬, 눈빛

어떤 날은 오후에 들렀다가 정씨댁 제사 준비 장면을 찍었다. 맷돌에 두부콩을 갈고 앞마당에선 빈대떡을 부쳤다. 또 뒤꼍에선 전을 부치는 등 일가친척 모두가 부산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보잘 것 없는 이 이방인에게 대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잘 익은 술이 있으니 한잔 하라는 것이었다. 사양했지만 할머니 두 분이 달려들어 끝내 나를 마루 끝에 끌어다 앉혔다.<42쪽>

헌책방을 취재하러 다니다 보면, 때로는 늦은 때가 되곤 합니다. 청계천에서도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헌책방도 그럭저럭 문 닫을 무렵이 되면 책방 임자와 그곳 오랜 단골 사이에 술자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마침 제가 그 헌책방을 찾아가면 '단골도 아닌 저'에게 "책 구경은 나중에 와서 해도 되니까 어서 와서 (고기) 한 점 들고 (술) 한 잔 받어!"하고 부르곤 합니다.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끝내 저를 놓지 않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건 저뿐이 아니고 다른 책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린 것도 없고 먹을거리도 없다 하겠지만,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는 마음이랄까요? "책이야 나중에도 볼 수 있지"라는 말에 책 구경도 접고, 사진기도 내려놓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렇게 고기 한 점 먹고 술 한 잔 받을 때마다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인심을 잃고 팍팍해진다고 하는데, 인심은 무엇이고 팍팍함이란 무엇인가?'하고요. 우리 모두 마음 속 한 켠에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살 텐데, 이 아름다움을 잃고 사람다움도 잃으며 헛구름만 좇지는 않나 모르겠습니다.

<4> 달라진 모습

서울 주변에 재개발 아파트 붐이 일자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평소 금 긋지 않아도 내 집, 내 땅이려니 생각했던 농민들도 내 집, 내 땅, 내 재산인 것을 확인하려는지 초가에 걸맞지 않는 시멘트 담을 쌓고 철줄을 쳤다. <98쪽>

따뜻하고 구수한 분위기가 감돌던 사진이 어느새 팍팍해집니다. 아, <잃어버린 풍경> 뒤쪽으로 갈수록 그 화사한 햇살과 웃음이 가득하던 돌담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논도 밭도 산도 들도 죄다 밀어버린 불도저가 보이고, 멍하니 공사현장을 바라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이고, 웃음 아닌 시름 가득한 얼굴이 보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공사터에서도 마음껏 뛰놉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놀 수 있을까요? 곧 아파트가 들어서고 무슨 상가나 단지가 들어서면 어디론가 쫓겨나야 할 텐데요.

성남과 광주를 오가던 먼지 나던 버스길도 사라집니다. 올림픽촌이 들어서고 올림픽파크 호텔이 들어섭니다. 시골버스는 더는 먼지 날리는 길을 달리지 못합니다. 끝까지 고향땅을 지키려던 기와집과 초가집도 아파트에 뺑 둘러싸인 채 외로이 있다가 하나둘 무너지고 헐려 버립니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방이동, 문정동, 둔촌동, 고덕지구, 삼성동, 방배동, 삼전동, 잠실, 오금동, 대치동, 가락동 들이 생겨나고 솟아났습니다.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파헤쳐지는 것을 보고 노인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132쪽>"는 이야기는 김기찬님이 몸소 노인들과 만나고 노인들이 살아가는 곳을 둘러보고 사진으로 담으면서 들은 이야기이자 느낀 이야기입니다.

김기찬님은 <잃어버린 풍경> 머리말에서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변하고 사라질 것인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존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도 자연스럽고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텐데, 헛구름과 같은 무엇에 매달리고 쫓아다니면서,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내동댕이치고 내다 버리지 싶어요.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참 즐길 것은 무엇인지, 참으로 바라고 찾을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풍경'도 많고 잃어버린 '마음'도 참으로 많아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어른들에게는 잃어버린 풍경이고 마음이겠지만, 갓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풍경과 마음' 모두 잃어버리게 할 생각은 아닐 테죠? 그렇다면 우리가 즐기고 부대낄 '풍경과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찾아보면서 지키기도 하고 가꾸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지사항

- 책이름 : 잃어버린 풍경
- 사진찍은이 : 김기찬
- 펴낸곳 : 눈빛(2004.9.1)
- 책값 : 23000원

덧붙이는 글 | - 김기찬님은 지난 2004년 10월, 옥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네 문화예술이 발돋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해서 주는 훈장이었답니다. 참 반가운 소식이기에, 이 자리를 빌어서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기찬님은 이제 '골목안 풍경' 사진 일은 마쳤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모습과 사진으로 우리 앞에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리라 믿습니다.

- 이 글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기찬님은 지난 2004년 10월, 옥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네 문화예술이 발돋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해서 주는 훈장이었답니다. 참 반가운 소식이기에, 이 자리를 빌어서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기찬님은 이제 '골목안 풍경' 사진 일은 마쳤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모습과 사진으로 우리 앞에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리라 믿습니다.

- 이 글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잃어버린 풍경 - 1967-1988, 개정판

김기찬 지음,
눈빛,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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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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