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은 야무지니까 어딜 가도 잘살 거야"

<서울일기 19>과외 아닌 과외교사, 사위 아닌 사위

등록 2005.01.20 14:37수정 2005.01.2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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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나는 길 위에 서서 길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과외 아닌 과외교사를 하고,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사위 아닌 사위였다.
1987년 1월, 나는 길 위에 서서 길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과외 아닌 과외교사를 하고,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사위 아닌 사위였다.이종찬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꾸만 줄어드는 나의 삶
아둥바둥 사지를 틀면 틀수록 자꾸만 똑똑 부러지는 하루
날이 갈수록 점점 쪼그라드는 황토빛 맨살
꺼멓게 타들어가는 나의 심장


이른 새벽, 시퍼런 칼날에 내 몸을 갖다댄다
황토빛 맨살로 뚝뚝 떨어지는 슬픔
꺼먼 피 뚝뚝 흘리며 뾰족히 일어서는 아픔
허우적 허우적 너를 그린다

눈물처럼 촉촉한 네 눈동자를 그리다가
기다림처럼 오똑 솟은 네 코를 그리다가
성에처럼 차디찬 네 입술을 그리다가
그만 자빠져 무르팍이 깨진다

좋다 널 그리다가 이대로
내 맨살 몽땅 다 닳아 없어질지라도
내 심장 뿌리까지 몽땅 다 뽑힐지라도
너 향한 그리움 끝내 접을 수 없다

이대로 절뚝이며 절뚝이며 나아가다가
마침내 까만 피거품 토하고 쓰러질지라도
마침내 네 목숨 훠이훠이 꺼멓게 흩날릴지라도
너 향한 사랑 끝내 버릴 수 없다

-이소리 '몽당연필' 모두



그해, 나의 하루 하루는 아둥바둥 몸부림치면 칠수록 자꾸만 똑똑 부러지는 몽당연필과 같은 고된 삶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대로 서울살이를 포기하고 고향 앞으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다. 그것이 곧 나의 문학을 몽당연필의 심처럼 올곧게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87년 1월 중순부터 나는 학습지 판매 구역을 이른바 부자 동네라 불리는 강남 쪽으로 옮겼다. 그동안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신림동과 봉천동의 학습지 판매 구역은 그 처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아까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처녀가 제법 이름이 있는 출판사 편집부에 취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학습지 구역을 강남 쪽으로 옮기고 난 뒤부터 나는 신림시장 국밥집에 거의 들르지 못했다. 마음은 늘 가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곳의 학부형들은 내가 학습지를 들고 방문할 때마다 학습지 판매원이 아닌 선생님으로 깍듯히 모셨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과외 비슷한 수준으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과외를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과외교사와 서로 짜고 쉬쉬하며 자녀들에게 고액 과외를 시켰다. 과외를 받는 자녀들도 비교적 나이가 젊은 과외교사에게는 '사촌형'으로, 나이가 지긋이 든 과외교사는 '이모부' 혹은 '삼촌' 등으로 부르며 불법 과외를 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쪽집게라면서요?"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치미 떼시기는. 신림동에 있는 동생한테 다 들었어요. 얼마면 되겠어요? 큰 거 한장(100만원)이면 되겠어요?"
"어머니! 저는 과외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도 뉴스에 크게 나왔잖아요. 그것도 바로 옆 동네였잖습니까?"
"저는 우리 애가 1등하는 거는 바라지 않아요. 그저 국영수 성적이 90점만 넘게 해 주시면 돼요."


사실, 큰 거 한장이라는 그말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당시 그 돈이라면 애써 여러 학생들에게 학습지를 돌리지 않아도 충분히 식의주를 해결하고 적금까지 부을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게다가 그 학부형은 자녀의 국영수 성적이 오를 때마다 보너스로 돈을 더 얹어 주겠다고 했다.

비밀도 보장했고 시간도 많이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일주일에 세번씩, 저녁 시간에 2시간만 가르쳐 주면 된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그곳에 아파트 한채를 얻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학부형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내가 학습지를 들고 올 때마다 시간을 조금 더 내서 더욱 열심히 가르치겠다고 했다. 우선 눈앞의 돈도 돈이었지만 그 당시 과외는 불법이었다. 자칫하면 불법 과외교사로 낙인 찍혀 뉴스에 나오고 구속까지 될 수도 있는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선생님께서 정 그러시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죠. 그 대신 일주일에 두번씩은 꼭 오셔야 해요. 그리고 오실 때마다 30분씩은 가르쳐 주셔야 돼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번씩 들고 오시는 그 학습지를 제가 일주일에 네권씩 사면 되지 않아요? 그 대신 차비는 톡톡하게 따로 챙겨 드릴게요."


그랬다. 그 당시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학습지를 들고 갈 때마다 학생들에게 지난 주 나눠 준 학습지를 점검하고 새로운 학습지에 대해 10여분 정도 설명을 하곤 했다. 그랬으니, 그 학부형의 말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이내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나는 과외 아닌 과외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또한 강남 쪽 학부형들은 대부분 내가 들고 가는 학습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만 같았다. 강남 쪽 학부형들은 어쨌든 학습지를 많이 구입함으로써 내가 자녀들과 더 오랜 시간을 끌 수 있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학습지를 들고 갈 때마다 학습지값뿐만 아니라 차비 혹은 밥값이라며 따로 하얀 봉투를 주머니에 찔러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학습값 외에는 그 어떤 돈도 받지 않았다. 내가 하도 거절하니까 어떤 학부형은 학습지값을 넣은 봉투에 더 많은 돈을 넣어 놓기도 했다.

간혹 그 돈이 탐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 돈에 해당하는 학습지를 더 들고 갔다. 또한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과 더 오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생 한명이 일주일에 구입하는 학습지가 많아지다 보니, 간혹 학습지를 갖다 달라는 곳이 생겨도 더 다닐 시간도 없었다.

강남 쪽 학부형들은 그렇게 나를 과외 아닌 과외교사로 훈련시켰다. 실제, 그 당시 내가 학생 한명의 집에서 학습지값으로 받는 돈만 해도 제법 컸다. 뉴스에 나오는 그런 고액 과외비 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학습지를 만든 회사에 내는 돈을 빼고도 웬만한 샐러리맨의 월급 정도의 큰 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강남 쪽으로 학습지 판매 구역을 옮기고 난 뒤부터 나는 웬만한 사업을 하는 사장보다 더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같이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받는 돈이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목돈이 모이지 않았다. 하루 속히 목돈을 모아 방 두칸짜리 전셋방을 얻고 싶었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얼굴이 훤해졌구먼."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그래. 어때? 얼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걸 보니까 강남 물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로구먼."
"그만 놀리시고 막걸리나 주세요."
"돈도 잘 버는 사람이 막걸리나 먹어서 되겠어? 최소한 맥주라도 마셔야지."


반가웠다. 오랜만에 찾아간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는 여전히 어머니처럼 나를 따스하게 맞이했다. 국밥집 아주머니의 눈웃음에는 그 처녀의 흔적이 조금씩 어른거렸다. 문득 "따님은요?"하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 국밥집 아주머니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모처럼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셨다. 국밥집 아주머니 또한 내가 부어 주는 막걸리를 마다 않고 홀짝홀짝 마셨다. 그때 나는 국밥집 아주머니께서 은근슬쩍 지나가는 말로 따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하지만 국밥집 아주머니는 한번도 따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야속할 정도로.

"사람한테는 세번의 기회가 오는 거야. 그 기회를 놓치게 되면 평생을 어렵고 괴롭게 살게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지금 총각한테 그 첫번째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총각이 돈 좀 번다고 함부로 풍덩풍덩 쓰지 말라는 그 말이야."
"푼돈이 되어서 그런지 좀처럼 모이지가 않습니다."
"푼돈이 모이지 않은 목돈이 어디 있어. 낙숫물이 모여 옹달샘이 되고 그 옹달샘이 다른 옹달샘과 합쳐져 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거야."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잘 살아. 아무튼 총각은 야무지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잘 살 거야."


그 말씀을 하시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표정이 몹시 슬프게 보였다. 언뜻 불빛에 눈물빛이 반짝 하고 비치는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취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그날따라 국밥집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한잔 더 줘"하면서 내가 부어 주는 막걸리를 조금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이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와 만나는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근데, 그 뒤에 내가 다시 신림시장을 찾았을 때 그 국밥집 주인은 바뀌어 있었다. 야속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그냥 떠나버린 국밥집 아주머니가 더없이 야속했다. 아니,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내게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하라고 일부러 그랬던 것인지도 몰랐다.

1987년 1월 말,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처녀와의 짧은 만남도 그렇게 기억 속에 천천히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해마다 1월이 되면 그때 그 신림시장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 국밥집, 어머니 같던 그 국밥집 아주머니의 따스한 눈웃음이 떠오른다. 지금쯤 그 아주머니와 그 처녀는 어디쯤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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