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어떻게 먹어?"

눈을 먹을 수 있는 그 날은 언제쯤일까

등록 2005.01.24 13:32수정 2005.01.2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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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소복이 쌓인 배추밭
눈이 소복이 쌓인 배추밭이종찬

하얀 눈 위에 구두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 소복
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발자국
겨울 해 다 가도록 혼자 남았네

- 김영일 작사, 나운영 작곡 '구두발자국' 모두


지난 일요일(16일), 좀처럼 눈 구경하기가 힘든 이곳 창원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아침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투둑투둑 들려 '이 땡겨울에 웬 장마비'하며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눈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간밤에 내린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였다.

근데, 점심나절이 다가오자 갑자기 밖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솜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와 동시에 큰딸 푸름이와 작은딸 빛나의 입에서는 "와아! 눈이다!"라는 환호성이 동시에 터졌다. 갑자기 두 딸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마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마을이종찬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이종찬
방문이 들썩거리고 마루를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딸은 내 디카까지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푸름이가 집으로 다시 들어오는가 싶더니 "아빠! 사진 좀 찍어줘"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어젯밤 숙취에 시달리던 나는 "나중에"라며 귀찮아했다.


"아빠! 나중에 눈이 그치면 어떡해!"
"사진은 눈이 내릴 때 찍는 것보다 그친 뒤에 찍는 것이 훨씬 더 잘 나와."
"그래도. 그리고 눈 올 때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단 말이야."
"아빠! 피곤해. 그냥 너희들끼리 찍어."


내가 푸름이와 빛나만 할 적에는 이곳 창원에도 눈이 참 많이 왔었다. 그 당시 나와 동무들은 우리 마을에 눈이 내리기만 하면 마치 신 들린 듯 밖으로 나가 온 마을과 들판을 헤집고 다니며 놀았다.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혓바닥을 쏘옥 내밀어 받아먹기도 했고, 하얗게 쌓인 눈을 그릇에 담아 사카린을 넣어 빙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이종찬

눈이 쌓인 비음산 들녘
눈이 쌓인 비음산 들녘이종찬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며, 누가 누가 더 예쁘게 만드느냐에 따라 고구마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와 동무들은 골목골목을 마구 누비며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다녔다. 이어 커다란 눈뭉치 두 개가 만들어지면 저마다 자기의 집 앞에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앞산가새에 올라가 솔가지를 꺾어와 눈사람의 눈썹을 붙이고 부엌에 들어가 숯토막을 들고 와 눈사람의 눈, 코를 만들었다. 그리고 붉으죽죽한 낙엽 두 개를 주워와 눈사람 입술을 만들어 붙이고, 아버지의 밀짚모자를 꺼내 눈사람의 머리 위에 씌우면 그만이었다.

"이야! 저 가시나가 만든 저기 제일 이뿌다. 입수구리(입술)에 뺄간 색연필을 붙혀놓은께네 눈사람 저기 새색시 겉다."
"이뿌기는 가시나 저기 만든 기 제일 이뿐데, 장군처럼 멋진 거는 내 꺼 아이가?"
"그라모 제일 이뿐 거하고 제일 멋진 거하고 오늘 당장 시집 장가 보내뿌자."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하얀 눈 속에서도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
하얀 눈 속에서도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이종찬

나뭇가지에 쌓인 눈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종찬

그렇게 눈사람 심사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눈싸움이 시작되면 가시나 머스마 할 것 없이 눈밭을 마구 뒹굴며 상대편을 향해 눈뭉치를 마구 내던지며 앞으로 달렸다. 눈뭉치를 맞으며 얼른 달려가 상대편이 세워놓은 눈사람을 짓뭉개 버리면 눈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근데, 그렇게 눈싸움을 하다가 눈뭉치에 맞아 이마가 터져 피를 벌겋게 흘리는 동무들도 있었다. 간혹 눈싸움에 이기기 위해 눈뭉치에 돌멩이를 집어넣어 던지는 그런 동무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칙이었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눈싸움이 아니라 진짜 패싸움으로 변할 때도 있었다.

"야야~ 인제 고마 하고 눈으로 아이스케키나 만들어 묵자."
"아이스케키로 우째 만들라꼬?"
"씰데 없는 걱정 하지 말고 니는 퍼뜩 대나무나 베어온나. 그리고 니는 집에 가서 사카린이나 신화당 좀 가꼬 오고."


억새와 눈
억새와 눈이종찬

크리스마스 트리가 따로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따로 없다이종찬
그랬다. 그 당시 군것질 한 돈이 한 푼도 없었던 우리들은 눈에 사카린이나 신화당을 조금 섞어 대나무에 꾹꾹 눌러넣어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깨끗한 눈을 걷어 만든 아이스케키는 정말 달고 맛있었다. 나와 동무들은 그 눈으로 만든 아이스케키를 먹다가 시퍼래진 입술을 바라보며 마구 깔깔거리기도 했다.

"아빠 어릴 적에는 눈이 오면 어떻게 놀았어?"
"아빠 어릴 적에도 너희들처럼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놀았지. 그때는 이 눈을 참 많이도 먹었지."
"눈을 어떻게 먹어?"
"이 눈으로 빙수도 만들어 먹고 아이스케키도 만들어 먹었지."
"아이스케키는 또 뭐야?"
"음, 그러니까 지금의 아이스크림 같은 거지."
"아빠! 그럼 나하고 빛나한테도 그걸 만들어 줘."
"안돼! 요즈음 눈은 공해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종찬
그래. 그때는 지금처럼 겨울이 따뜻하지도 않았다. 겨우 내내 수은주가 영하로 밑돌 정도로 무척 추웠다. 그랬으니 눈도 자주 내릴 수밖에. 또한 그때 내리는 눈은 몹시 희고 깨끗했다. 빙수를 만들어 먹다가 눈이 녹은 물을 바라보면 우물물처럼 티 한 점 없이 맑기만 했으니까. 그래. 공해 없는 세상, 우리 아이들이 눈을 먹어도 되는 그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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