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 문세광 사건 당시 죽다 살아난 권영길

사건 당일 로비에서 문씨와 지근거리... "총격전 벌어졌다면? 오싹"

등록 2005.01.21 14:57수정 2005.01.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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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자료사진)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문세광 사건'이 일어난 1974년 8월 15일, 당시 <서울신문> 4년차 기자였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권영길 의원은 당시 중부경찰서 출입기자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문세광씨가 애초 계획대로 로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했다면 마침 문씨 근처에 있던 권 의원도 경호원들의 유탄에 맞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권 의원은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발간된 평전 <권영길과의 대화>(김경환 지음)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밝혔다. 책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이 문씨를 행사장 로비로 들여보냈지만,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이 로비를 서성거리를 문씨를 "그 쪽에 서있으면 안된다"며 한 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 때 박 전 대통령이 로비에 들어섰다.

사건 다음날 권 의원은 뒷구멍을 통해 언론 취재를 불허한 채 현장검증을 진행하고 있는 극장에 숨어들었다. 권 의원은 "무대 뒤에 숨어서 수사관들과 전문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모골이 송연해졌다"고 한다. 문씨의 원래 계획이 로비에서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하는 것이었고 계획이 실행됐다면 자신도 맞아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 사건으로 중부 경찰서 정보과장이 구속되자 권 의원은 이에 대해 기사를 쓰겠다고 나섰다. 정보과장은 문씨를 검문해 박 전 대통령의 목숨을 살린 일등 공신이고, 행사장 외곽과 로비, 복도 등의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의 책임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권 의원은 데스크의 만류로 특종을 하고도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권 의원은 당시 <서울신문>에 대해 "유신 체제와 군사 독재를 홍보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문"이라고 비판하며 "기자로서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공정 보도와 언론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밝혔다.

권 의원은 2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문세광의 정체에 대해서는 지금 뭐라고 언급할 수는 없지만 당시 상황은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며 "계단 밑에서도 문씨와 나란히 서있었고 '재일동포인데 고생한다'는 정도의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권 의원에 따르면 문씨는 체격이 건장하고 인물이 좋은 청년이었다고 한다.


권 의원은 "공중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총소리가 들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취재를 했고 다음날 무대 뒤편으로 몰래 들어갔다"며 "그러나 이후 데스크에서는 '청와대 경호실 눈이 뒤집혀 있어 권 기자 신변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기사 출고를 말렸다"고 전했다.

다음은 <권영길과의 대화> 중 문세광 사건 부분.


1974년 8월 15일, 중부 경찰서를 출입하던 권영길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취재하고 있었다. 로비에서는 청와대 경호실과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펴며 출입자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 한 낯선 사내가 로비에 들어섰다.

"당신 뭐야?"
"재일 동포입니다."

청와대 경호원은 미심쩍어 했지만 그의 신원을 확인하고 들여보냈다. 긴 의자에 앉아 권영길과 얘기를 나누던 중부 경찰서 정보과장이 로비를 서성거리던 그 사내를 발견하고 "어이, 그 쪽에 서있으면 안돼" 하면서 일어섰다. 그가 바로 문세광이었다. 정보과장이 낯선 사내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 때 박정희가 로비에 들어섰다. 권영길도 동정 취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박정희 쪽으로 다가갔다. 박정희는 로비를 지나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광복절 경축 행사가 시작되었다. 뒷자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권총을 뽑아 든 그가 복도 중간쯤을 지났을 때, 좌석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의 발을 걸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총을 쐈고, 박정희는 단상 위로 엎드렸다.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빈손으로 문세광을 겨누는 시늉을 했고 다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튿날 철저한 봉쇄 속에 현장 검증이 있었다. 언론의 취재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권영길은 기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뒷구멍을 통해 몰래 숨어 들어갔다. 무대 뒤에 숨어서 수사관들과 전문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권영길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문세광의 원래 계획은 로비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 계획이 실행돼 총격전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권영길 또한 옆에 있다가 유탄에 맞아 죽었을 것이 아닌가.

이 사건은 숱한 수수께끼를 남긴 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아무튼 그 날 박정희의 목숨을 살린 일등 공신은 중부 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그가 문세광을 검문하지 않았다면, 박정희는 행사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경비 소홀의 책임을 지고 구속되었다. 행사장 외곽과 로비와 복도 등 대통령이 움직이는 동선에 대한 경호 책임은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다. 권영길이 그 내용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하자 데스크가 말렸다. 특종을 하고도 기사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자들에게는 누구나 특종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야 신문사도 빛이 나고요. 그런 욕심이 없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생명력을 잃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울신문>에서 그 욕심을 버렸습니다. 유신 체제와 군사 독재를 홍보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문에서 특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경영진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다녔습니다. 기자로서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공정 보도와 언론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좋은 기사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고 괜히 알면서도 일방적인 기사만 써야 하는 고민에 시달려야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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