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령 철종의 예릉

마지막 조선왕릉

등록 2005.01.22 10:42수정 2005.01.2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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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 왼쪽이 철종, 오른쪽이 철인왕후의 무덤이다. ⓒ 한성희

서삼릉이란 도성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을 의미한다. 현재 서삼릉에서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능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인 예릉이다.

효릉이 축협 소유의 초지로 둘러싸여 축협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가 볼 수 있는 능이란 건 이미 밝혔다. 서삼릉은 조선왕실의 묘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최대 화소지역이며 왕실공동묘지이기도 하다.

철종의 능을 보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철종에서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말은, 강화도령, 무식하고 힘없는 허수아비 왕,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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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의 다리근육은 사실감이 뛰어나며 꽃문양이 섬세하다. ⓒ 한성희

철종은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왕실의 권위가 추락한 것을 보여주는 임금이며, 조선이 망한다는 걸 예고하며 등장한 제왕이다. 제왕, 사실 철종에겐 제왕이라는 단어도 안 어울린다. 그 정도로 왕이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형편없는 임금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예릉에 올라서면 허수아비 왕답지 않은 석물의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조선왕릉을 답사해본 사람들이라면 느끼겠지만, 석물 중에서 무인석과 문인석은 신기할 정도로 무덤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얼굴이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보고난 후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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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답지 않게 당당한 무인석. ⓒ 한성희

왜 그럴까? 고개가 아프도록 갸우뚱거리며 생각해본 내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과 왕비가 죽고난 후 새로 등극한 왕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른 정치적 이유다. 즉, 파워 게임이라는 얘기다.

두 번째, 왕릉의 석물은 당시 최고의 석공이 만들었고, 그런 석공이라면 그동안 봐왔던 왕에게 느꼈던 감성이 이끄는 영혼에 따라 제작했을 것. 즉, 예술가의 혼이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이유다. 사실 석공의 예술혼에 이끌린 창작 결과라는 감상적 이유가 내 결론이다.

그런데 철종(1831-1863)의 예릉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철종 시대는 왕권이 신권에 눌려 초기의 막강한 왕권은 전설의 고향이 될 정도로 약 먹은 병아리처럼 힘없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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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의 특징은 상석앞에 있어야할 장명등이 한참 앞으로 나와있는 점이다. 능상과 사초지가 넓고 웅장하다. ⓒ 한성희

농사를 짓다 잡혀와 왕위에 올라 어느 정도 정치를 파악하자, 그래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시도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실도피책으로 여색을 탐하다 죽은 철종은 얼결에 왕위로 오른 지 3년 후 친정을 하게 되자, 나름대로 백성을 구제하고 선정을 펴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안동 김씨의 서슬에 눌려 이내 포기하고 만다. 왕비조차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이었고 사방에 안동 김씨의 눈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 놓인 허수아비 왕은 대궐에 있는 여자는 모조리 왕의 여자니 좌절의 도피책으로 여색 탐닉에 몰두한다. 여색에 빠져 요통에 걸려 누웠다가 32살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양반이 철종이다. 아들을 남기지 않아 대원군과 조대비의 밀약에 의해 고종이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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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왕자의 공동묘지에 있는 철종과 철인왕후의 원자 무덤. ⓒ 한성희

철종의 후손이 영혜옹주 외엔 없어서 고종이 등극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철종은 철인왕후 외에 공식 후궁을 7명이나 둘 정도로 여색을 탐한 왕이다. 그 결과 자손을 여럿 얻긴 한다. 그 자녀들이 모조리 유년기에 죽는 비극을 맞아 자손이 없다고 알려진 것이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단 하나 살아남은 영혜옹주가 태극기를 제작하고 개혁파로 알려진 박영효에게 시집갔지만 몇 달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아 철종의 후손은 완전히 대가 끊긴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대원군이 시정잡배와 어울려 안동 김씨의 의심을 피하며 이를 갈아붙인 것은 왕권 되살리기를 위함이었고 철종이 죽고 권좌에 오르자마자 안동 김씨를 때려잡는다. 대원군이 주관했던 철종의 국장은, 조선왕실의 권위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철종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왕릉이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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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 한성희

철종의 예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라 할 수 있다.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은 일제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 이름은 황제릉이라 해도 석물의 조잡함과 함께 왕실 품위는 사라져 무늬만 황제릉으로 봐야 한다.

대원군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정자각도 크고 웅장하며 처마마루의 잡상도 평균 3개인 다른 왕릉보다 2개 더 많은 5개가 올라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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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 한성희

정조가 죽자 11세의 순조(1790-1834)가 즉위하면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순조도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아들이니 방계출신이다.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가 죽는 바람에 11살 순조는 정조24년(1800)에 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6월에 왕으로 등극한다.

순조가 15세에 친정을 하며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자 이번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안동 김씨 문중의 세도정치가 꼬리를 물어 이때부터 장장 60년간의 안동 김씨 세상으로 변한다.

독살설이 의심되고 있는 정조 이후, 안동 김씨의 화려한 등장으로 조선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봐야 한다. 후에 대원군이 등장해 안동 김씨를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60년 동안 그들이 뿌려놓은 조선 몰락의 씨앗을 없애기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후세들에게 조선왕조가 욕을 얻어먹게 되는 원인은 안동 김씨 일족이 이룩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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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는 고종의 황제등극 이후 어거지로 왼쪽에 어도를 하나 덧달아 어색하기 그지 없다. ⓒ 한성희

집안이 망하려면 줄줄이 꼬리를 물고 흉사만 일어난다더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리해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려고 인재등용 등 선정을 펴고 왕권을 회복하려 안간힘을 쓴다. 조선왕조의 몰락은 정해진 것인지 3년간 정사를 잘 돌보던 효명세자는 22세의 펄펄한 나이로 갑자기 죽어버리고 세손인 헌종(1827-1849)이 8세에 왕위에 오른다.

조선왕실에서 보면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팔자고, 안동 김씨 가문에서는 경사 났다고 춤 출 판이다. 과부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8년간이나 이어졌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발판이 더욱 굳건해진 셈이다.

김조근의 딸이자 정조의 며느리 순원왕후(1789-1857)는 남편과 손주보다 오래 산 덕택에, 손자인 헌종이 죽고 나서도 철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는 지대한 공로를 남겨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든든한 어깨 역할을 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은 순원왕후에게 딱 들어맞는다.

불쌍한 허수아비 왕이라고 해야 하나, 농사꾼에서 갑자기 왕으로 올라 팔자가 하루아침에 바뀐 행운아라고 해야 하나?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이고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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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등진 문인석. ⓒ 한성희

정조 이후의 순조와 헌종, 철종 세 임금은 현재 역사를 보는 사람들에게 조선왕조의 제왕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인정도 못 받는다. 카리스마가 없어, 순조와 헌종은 세조나 태종, 세종대왕, 숙종 등 조선의 다른 왕에 비교하면 거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사실 다른 왕들의 일화나 이름은 대략 알고 기억한다. 순조나 헌종이라는 조선의 왕이 있었던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태정태세문단세"를 꼽고 나서야 그런 왕이 있었구나 겨우 인정할 아리송함까지 남길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왕들이었다.

역설적으로 뒤집어보면, 이 시대의 순조와 헌종은 잘 모를지언정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누구나 알 정도로 조선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안동 김씨가 조선의 제왕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해답이 도출된다.

천애고아였고 학문도 없는 농사꾼 강화도령을 왕으로 앉힌 안동 김씨의 정치 15단 정도 되는 노련함은, 삼정의 문란과 공공연한 매관매직이 판을 쳐 소수의 명문가만이 잘먹고 잘사는 시대를 이룩(?)한다.

대원군과 정치밀약을 맺고 고종을 즉위시킨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대비는, 풍양 조씨 세도청치를 헌종대에 펼쳐 조선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로 망해가는 원인을 제공한 왕비 중 하나다. 남편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정작 왕비 자리는 올라보지도 못하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친정가문을 번창시킨 효녀다.

조선왕실 과부의 특징인 긴 명줄을 타고난 조대비는, 순원왕후와 철인왕후의 친정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을 쓰러트리려고 오래오래 살아남는다. 대원군과 손잡고 안동 김씨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대원군은 풍양 조씨마저 제거해버린다. 결국 안동 김씨가 망하고 풍양 조씨도 망한 데 이어 전주 이씨도 망하기에 이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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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조선왕릉인 철종의 능상. ⓒ 한성희

철종 시대에 이르면 양반비율이 무려 70%가 넘어서 전국민의 획기적인 신분상승화가 이뤄진다. 세금 면제받고 특권을 누리는 층이 많아지면 나머지 소수가 그들이 면제받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진 결과 대단한 사회변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성행해 70%가 넘는 양반을 양산한 것이 오늘날 전국민이 양반후예로 나타난다.

철종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불행한 삶이었을까? 대부분의 후세인들이 차라리 농사꾼으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것이라 하지만 허수아비 왕일지라도 왕위에 올라 살다죽는 것을 바라는 인간적 욕심은 없었을지? 세도정치에 헐떡이며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당시 민초들은 철종을 부러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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