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효자 인종의 효릉

서삼릉 깊은 곳에 인종의 눈물이 흐른다

등록 2005.02.01 20:46수정 2005.02.0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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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릉 가는 길 초지 위의 소나무. 뒤의 숲에 효릉이 있다. ⓒ 한성희

경기도 고양시 효릉으로 가는 길의 나지막한 구릉지대 넓은 초지 한 가운데는 가끔 잘생긴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다. 저 소나무들은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 서삼릉의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을 베어낼 때 요행히 살아남은 것이리라.

흙길 사이로 언 얼음을 밟고 겨울날 들어선 효릉 가는 길은 숲이 사라지고 푸른 초지도 보이지 않는 계절이라 더 황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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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석을 두른 왼쪽이 인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 한성희

12대 임금인 인종(1515~1545)은 재위 8개월만인 31세에 병으로 죽어 가장 짧게 재위한 기록을 남긴다. 3세부터 글을 알 정도로 총명했으며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고 학구적이었던 인종이 평화로운 시절에 왕위에 올랐다면 정조 못지않은 저술을 남기고 문화를 꽃피웠을 것이고 성군 소리를 들었을 터.

인종(仁宗)에 대한 후세의 한결같은 평가는 어질 인(仁)이 붙을 정도로 너그러웠고 효릉(孝陵)이란 능호를 받을 정도로 효자였다는 것이다. 군왕으로서 나무랄 데 없었으나 난세에는 간웅이 영웅이라는 말처럼, 도학자 같은 성품보다는 태종이나 세조의 카리스마를 조금만 닮았다면 훌륭한 성군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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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에 묻힌 채로 수백년간 말없이 효릉을 지킨 석호의 갈기가 세월 속에서도 뚜렷하게 살아있어 당시 석공의 솜씨에 감탄하게 한다. ⓒ 한성희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청렴한 선비기질의 인종이 권력을 두고 혈전을 벌이는 왕위를 지키기는 어려웠다. 사료를 보면 어릴 때부터 충효사상이 기본인 유학으로 교육받아 정신 무장된 인종의 이런 성품은 사람들에게는 존경받았지만 지나친 효의 집착으로 목숨을 단축시키고 만다.

조광조를 복위시키고 사림을 등용해 유학의 이상적인 정치를 꿈꿨던 인종은 지나친 효심 때문에 죽은 것이라 본다. 실제로 문정왕후가 독을 든 떡을 준 것인지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갑작스런 인종의 죽음에 분노한 사림에서 퍼트린 소문일 가능성도 부인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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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쳐진 담장 때문에 홍살문 출입이 불가능한 효릉의 참도 위에 홍살문의 그림자가 석양에 길게 누웠다. ⓒ 한성희

그러나 왕조실록에 나타난 사실만 보더라도 인종의 효심은 도가 지나쳐 국가의 흥망성쇠를 짊어질 왕으로서 무책임할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중종이 병에 들자 약을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옷을 벗은 적이 없을 정도로 손수 돌보고 병환이 더욱 위독해지자 대신들에게 종묘와 산천에 두루 빌게 했다. 겨울인데도 찬물로 목욕하고 분향하며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빌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엿새 동안 미음조차 전혀 들지 않았고 다섯 달 동안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았으며 죽만 마시고 염장(鹽藏)을 들지 않았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도 늘 상차(喪次)에 있었고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군국(軍國)의 일은 모두 대신에게 위임하였다. 초상 때부터 수척한 것이 극도에 이르러 대신들이 고기를 먹으라 청해도 물리쳤고 문정왕후가 권해도 마지못해 드실 듯했으나 들지 않았다.

왕이 병을 무릅쓰고 친히 혼전에 제사 지내려 해서 문정왕후와 대신들이 모두 말렸으나 ‘사신이 와서 자식의 도리를 못한 것이 매우 마음 아프다’며 들지 않았고 이때부터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었다(인종실록 권2).

이 기록만 봐도 어지간한 효자는 인종에게 명함도 못 내민다. 하늘이 내린 효자인 인종은 효도가 지나쳐 효도편집증(?)에 걸려 죽은 게 아닐까 한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어 못한 효도가 한스러워 문정왕후에게 지나친 효도를 하기까지 했으니 당시의 유교정서로서는 큰 존경을 받지만, 일찍 죽을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은 효자인 것이 중종과 장경왕후에게 과연 진정한 효도였을까?

조선임금 중 누구나 이의 없이 공인하는 최고의 효자였던 인종의 효릉은 능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홍살문까지 바싹 담이 둘러쳐져 홍살문 출입을 할 수 없다. 서삼릉에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비공개 능이고 주위가 모두 축협의 소유지라 서삼릉 관계자도 출입허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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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능상 병풍석. 푸른 상의를 입은 왼쪽 문화유산해설사를 비교해 보면 병풍석의 부역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간다. ⓒ 한성희

인종의 병풍석과 왕릉 병풍석

효릉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쌍릉이다. ‘내 죽거든 반드시 부모 곁에 묻고 모든 내 장사는 예문을 지나치지 말고 소박하게 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라’는 인종의 유명을 전한 인성왕후는 자기도 죽거든 인종 곁에 묻어 달라 하여 인종의 장사 때 옆을 비워 두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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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석의 인석. ⓒ 한성희

원래 인종의 능상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인성왕후(1514-1577)가 선조 10년 11월 64세로 죽자 인성왕후의 능상을 조성하면서 선조는 인종의 능에만 새로 병풍석을 두르게 한다.

그러고 보니 선조는 병풍석 두르기를 꽤 좋아했던 왕이다. 세조의 유명 이후 조선의 왕릉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문정왕후가 중종을 천장하면서 남편의 무덤에 병풍석을 휘휘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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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석의 면석에 새긴 문관 문양. ⓒ 한성희

그러나 이 병풍석이란 게 백성의 등골을 빠지게 만드는 고달픈 부역이 동반해야 한다. 보통 능 한 기에 병풍석을 두르려면 약 6000명의 부역군이 더 동원돼야 한다. 후사를 남기지 않았던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도 순회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없어 조선 최초의 왕비가 출생하지 않은 방계출신 선조가 등극했다.

세조의 카리스마는 후세의 왕들에게 계속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막강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병풍석을 두른 문정왕후의 허영심과 배짱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명종도 문정왕후가 죽자 마마보이답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문정왕후의 태릉에 병풍석을 둘렀다.

명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선조는, 명종과 선조8년에 죽은 명종 비 인순왕후의 능에 병풍석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아니면 미안했는지 인종의 능상에까지 병풍석을 휘휘 두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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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거주춤 서서 인자한 웃음을 띈 무인석. ⓒ 한성희

백성 등골 휘게 하는 병풍석 공사를 감수하면서까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해 방계출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는지 모를 일이다. 병풍석 집착증인 선조의 장릉에도 물론 병풍석이 있다. 그 병풍석은 영조가 임진왜란의 병란을 맞은 선조의 병살을 누르려고 두른 것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선조의 병풍석 집착은 타고난 팔자로 보인다.

인종의 무덤의 병풍석 면석에는 학문을 좋아했던 왕답게 문인(문관) 문양이 새겨져 있다. 허영심 많은 문정왕후가 주관했던 국장이라 정자각도 남다르다. 보통 정자각 전은 2칸이지만 이곳은 기둥이 하나 더 많아 3칸이다. 병풍석이나 3칸짜리 정자각이나 사치스런 옷을 입은 궁녀를 내쫓을 만큼 검소함을 실천했던 인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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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보다 꼿꼿한 기상이 느껴지는 문인석. ⓒ 한성희

효릉의 무인석은 다리를 꼿꼿이 펴지 않은 채 칼을 집고 어딘지 조심스럽게 서 있어 서릿발 같은 장수의 기상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장수답지 않게 인자한 웃음마저 띠고 있어 학자 기질의 인종을 닮았다. 오히려 무인석보다 문인석에서 선비의 꼿꼿한 기질이 느껴진다.

인종의 보이지 않는 인간적 느낌을 찾아보려고 운동장 만큼 넓은 무덤 주위를 돌아보다가 뭔가 미진함을 떨치지 못하고 내려왔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도학자인 인종이라도 분노는 없었을까? 효릉을 들어서면서 계속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이다. 인종의 기록에 의한 후세의 한결같은 평가보다는 자신의 기구했던 인생에서의 가졌을 내면의 분노를 효릉에서 찾아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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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릉 비각 지붕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듯한 용두. ⓒ 한성희

비각을 들여다보고 나서 무심코 비각 위의 지붕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지붕의 두 용두를 발견하고 잠시 말없이 쳐다봤다. 지붕 양쪽 끝의 두 용두는 하늘을 향해 절규하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분노를 거침없이 포효하는 중이었다.

“저 용두 좀 봐. 저런 표정 가진 용두 본 적 있어? 마치 하늘을 향해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정말 그러네.”

동행했던 문화유산해설사들이 그 용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난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인종이 참고 인내했던 인간 본능이 용두에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인종의 내면에서 갈등했던 인간적 모습을 굳이 찾으려 했던 내 바보 같은 감상이겠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인자하고 착했던 인종이 부모 곁에 잠들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무시하고 중종을 옮겨버린 문정왕후에게 분노하는 인종의 넋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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