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구멍 속에다 보금자리를 튼 산죽안병기
지금의 갑사는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철당간 지주는 냇물 건너편에 있어 원래의 갑사가 지금의 대웅전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개울 건너 대적전 근처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시누대 숲. 거기 한구석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동서로 맞서 있는 두 짝의 지주(支柱). 이 당간지주는 소박한 것일까 아니면 쓸쓸한 것일까. 마음 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맞서 당간지주 하나를 만든다.
겨울 바람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몇 백평 산자락에 빼곡히 들어찬 시누대들. 대나무는 왕대든 맹종죽이든 산죽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다 집단적 살이를 한다. 바람이 잠자코 있으면 목소리를 낮추어 도란도란 속삭이고 바람이 불어오면 다같이 "쏴아 쏴아" 울면서 집단적 공명(共鳴)을 이룬다.
독백으로 가득찬 이 시대를 살면서 내가 늘 아쉬워했던 건 대숲에서 나는 소리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공명을 이루는 말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만길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마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계층과 계층이, 세대와 세대가 서로 공명을 이루는 언어를 그리워했다.
시누대 사잇길을 지나간다. 갑사 부도가 나오고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길손을 맞이한다. 원래 갑사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윗부분으로 올라갈수록 조각 기법이 약해지긴 했지만 기단 아래 받침돌에 새겨진 사자·구름·용의 형상이 힘차고 대담하게 느껴진다.
냇물을 건너 갑사로 향한다. 경내로 진입하기 전 우연히 바라본 감나무 한 그루. 늙은 감나무의 몸에서 산죽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아름다운 기생(寄生)이었다. 나도 더 나이 들면 저 감나무처럼 그렇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