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산 오르는 길에 만난 사람들

"그래! 얘들아, 겨울산을 오르자"

등록 2005.01.25 03:57수정 2005.01.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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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토요일 아침 11시 30분입니다. 우리는 옷을 챙겨 입고 처제네 식구들과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창원 도계동 뒷산으로 해서 용추계곡으로 내려올 예정이고, 내일은 천주산을 탈 작정입니다.


골프장 옆길

안골을 따라서 조금 들어가면 골프장이 있습니다. 등성이 부분을 골프장이 가로막아 우리는 몇 번이나 로프를 잡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했습니다. 토요일이어선지 골프 치는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따악'하는 경쾌한 금속성 음이 겨울 산 공기를 흔듭니다.

등산을 시작한 지 1시간여가 흘렀으므로 우리는 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김밥과 따뜻한 물로 우선 요기를 해둡니다.

"아버지, 이런 골프장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책에서 보니까 골프장 잔디에는 많은 농약을 쳐서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하던데, 적은 사람들이 운동하기 위해 이렇게 산을 잘라서 골프장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아들은 골프장 때문에 로프 줄을 잡고 오르내린 것 때문에 골이 나서 볼멘소리를 합니다.


봉림산 정상 오르기

이제 창원 사격장 뒷산입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끝없이 계단이 이어져 있습니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한 탓인지 몸이 무겁습니다. 위쪽에서 녹색 띠를 어깨에 두른 두 사람이 큰 자루를 들고 쓰레기를 주우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나도 쓰레기 몇 개를 주워서 그들의 자루에 담아 줍니다. 우리 지역에서 마라톤으로 명성이 높은 회사 마크를 달고 있습니다.


"아따, 그 회사는 마라톤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만 산 청소도 잘 하네."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들은 크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소리를 연발합니다.

산 옆 돌너드랑에는 작은 돌무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나는 애장(돌로 만든 애기무덤)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지만, 그냥 사람들이 쌓은 돌탑인 듯 보입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소 먹이러 가서 소를 산에 올려놓고, 친구들과 이런 돌너드랑에서 많이 놀았단다. 이런 곳에 깻묵(깨금 또는 개암)열매나 다래, 머루 등이 많이 있었거든. 한참을 놀다가 심심하면 이런 돌무더기를 쌓았지. 한 번은 여러 돌무더기를 쌓았다가 무너뜨리는데 진짜 애장을 건드렸는지, 애기 옷이 보이는 거야."

"애장이 뭐예요? 안 무서웠어요?"

"옛날에는 갓난애들이 많이 죽었거든. 그러면 형편이 있는 집에서는 장독 같은 데다가 넣어서 묻기도 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그냥 가마니에 죽은 아이를 싸서 지게에 져다가 이런 돌무더기를 들어내어 공간을 만든 다음, 바닥을 편편하게 해서 묻고, 이렇게 도톰하게 표 나게 만들었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더구나. 그런데 어쩌다 여우란 놈들이 시신을 훼손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애기 옷을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느냐! 우리는 혼이 나가서 줄행랑을 쳤다가 끝내 돌아와서 다시 돌을 덮어 주었단다."

돌너드랑의 애장 모양을 한 돌탑
돌너드랑의 애장 모양을 한 돌탑한성수

이제 정상이 보입니다.

정상에서 만난 사람

해발 566.7m 봉림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을 먹습니다.

"아, 참 맛있겠다. 다음에는 우리도 컵라면을 가져옵시다. 자, 다들 조심해서 내려갑시다."

30여명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산을 내려갑니다. 가만!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좀 다릅니다. 모두 2인 1조로 뒷사람은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있습니다. 뒤에 계신 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꿍' 넘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이 밑에서 달려옵니다. 다행히 다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고함을 지르며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스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잘대던 아이들도 이젠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단단히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내려오는 길

이제 용추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옵니다. 곳곳에 눈이 쌓여 있고, 더러 녹아서 길이 미끄럽습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그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 미끄러운 길을 올라와서 그 가파른 길을 내려가고 있겠지요. 우리는 그들이 무사히 당도하기만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작은 봉우리의 정상입니다. 표지석은 '(구)내봉림산, (속)내정병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 어떤 이름이 진짜 이름이에요?"

"봉림산은 글자 그대로 '봉황이 깃든 산'이라는 뜻이 아니냐!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교종은 5교, 선종은 9산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때 참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선종의 봉림산문이 이 곳에 있었던 것이 이 산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런데 일본강점기에 정병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산 이름을 정병산으로 고쳤다고 들었다. 너는 어떤 이름이 진짜 같니?"

산에서 다시 큰 자루를 든 젊은이 네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옷에는 산림청소속 공익요원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그들의 양손에는 그득하게 귤껍질을 들고 있습니다.

"귤껍질은 그냥 두어도 썩을 텐데?"
"귤껍질은 잘 안 썩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자꾸 버리네요."

나는 슬그머니 무안해집니다. 오다가 귤을 먹고 껍질을 버렸거든요. 어쨌든 모두 이리 신경을 써 주니 산이 깨끗한가 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위험한 로프를 타고 가야 했던 곳을 이제 나무계단을 만들어 안전하게 해 놓아서 참 좋습니다.

용추계곡에는 얼음이 꽁꽁 얼었는데, 그 사이로 시냇물이 졸졸 흐릅니다. 나는 찬물에 손을 씻고, 아이들은 얼음을 깨어서 입에 넣습니다. 계곡입구 포장마차에서 부추전 한 접시를 안주로 조 껍데기 막걸리 한 사발을 동서와 나눠 마십니다.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해 오고, 채 차지 않은 둥근달이 우리를 곱게 비춥니다. 어제는 그리 다투던 오누이가, 이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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