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칼테러' 맞서던 진정성은 어디로 갔나

[위기의 노동운동 ①-진단] 대기업 노조 왜 설 자리 잃었나

등록 2005.01.27 12:00수정 2005.01.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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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노조 채용비리와 관련해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노동운동 간부가 취업비리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난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침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기업 노조를 향한 비난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노조 내부에서는 "드디어 터질 일이 터졌다"는 반응과 함께 "대기업 노조운동의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자성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기업 노조의 문제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마련하는 기획을 3차례(①진단 ②해법 ③각계요구)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편집자 주


a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과 간부들이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채용비리에 노조간부가 관련된 것에 대해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대국민사과 성명서를 발표한 후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과 간부들이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채용비리에 노조간부가 관련된 것에 대해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대국민사과 성명서를 발표한 후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계속 추락하는 노조 조직률... 11%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전체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지 의문이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11%에 불과한 현실에 대해 한 노사전문가는 이렇게 반문했다.

지난해 12월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말까지 한국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은 11%에 불과하다. 전체 임금 노동자 1414만명 가운데 154만 9949명(노조 수 6257개)이 노조에 가입돼 있는 것이다. 이는 70년대 이후 최저치다.

노조 조직률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89년 19.8%까지 올라갔다가 1991년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고용 형태별로는 정규직 노조 조직률이 21.4%인 반면 임시직과 일용직은 각각 1.4%, 0.4%에 불과하다. 노동부와 노동계는 노조 조직률의 급감 원인을 비정규직 증대, 여성 노동력 증가, 여전한 노조 기피 현상 등에서 찾고 있다.

반면 OECD 가맹국들의 노조 조직률은 2003년을 기준으로 대만 38.4%, 일본 20.2%, 영국 29.0%, 독일 22.3%, 호주 23.1% 등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미국도 각각 19.3%와 13.2%에 이른다.
"한국의 전투적 노조는 고립 상태에 있다. 강성노조가 노동자 및 국민 일반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노무현 대통령은 영국 주요기업 CEO(최고경영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국에 투자 확대를 요청하면서 대기업 노조에 대해 독설을 쏟아냈다. 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선 대기업 노조의 양보와 협력이 절실하다"고 대기업 노조를 압박했다.

이같은 발언을 두고 노동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 노조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이 없다.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겠다는 공약이 빈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대통령의 대기업 노조 비판이 국민들에게 먹히는지, 대기업 노조는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조 활동을 하는 한 관계자는 '정부의 대기업 노조 죽이기'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대기업 노조 자신이라고 진단했다. 대기업 노조가 밖으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과의 연대에 미온적이고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놀고 먹는 빨간 조끼?

지난해 12월 22일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현대자동차 노조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에 앞서 12월 9일 노동부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01개 하청업체 8396명 전부가 불법파견을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의원 선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대 투쟁이 아쉬웠던 비정규직 노조에서는 정규직 노조에게 "공동집회를 한번만 갖자"고 사정했지만, 차일피일 미뤄졌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들은 현대차 노조 대의원들을 '놀고 먹는 빨간 조끼'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조 대의원은 현장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노조와 조합원을 연결하는 실핏줄 역할을 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다.

물론 현장에서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의원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대의원들이 작업 통제권을 가지고 오히려 회사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들과 건강한 노조 활동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다.

울산의 한 노동운동가는 "회사가 노조 허리층인 대의원을 매수해 현장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면서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직의 희생을 댓가로 회사와 야합해 정규직의 이익만을 챙기고 있다"고 자성을 촉구했다.

한 공단 정규직 노조의 이해할 수 없는 파업

a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승용차 생산라인.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승용차 생산라인. ⓒ 권우성

지난해 12월 29일과 30일 정부 산하기관 노조의 한 지부에서 정규직 파업이 진행됐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조와 공단이 맺은 기본 협약이 정규직 노조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반발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인사권을 일정 부분 행사했는데, 비정규직 노조가 공단과 직접 협약을 맺게되면 그 권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내 밥 그릇은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정규직의 파업 선언이었던 셈이다.

정부 산하기관인 이 노조는 10년간 무쟁의를 선언한 상태였지만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파업 현장에 다음과 같이 적힌 피켓을 들고 나왔다.

"역차별을 반대한다."

이 산하기관의 비정규직노조는 1년짜리 목숨인 불안정한 신분과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다. 물론 정규직 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정규직 노조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독자적인 노조를 만들었고 현재 정부 산하기관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정규직에 비해 임금이 50%에 불과하다.

이곳 비정규직 노조의 위원장은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노조 이름이 공개되면 파업을 벌인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간의 갈등이 생길 수 있고, 그러면 비정규직들이 힘들어진다"면서 익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식칼테러에 맞서던 진정성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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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회사 쪽의 매수놀음에 놀아난 노조간부도 문제지만, 이런 비리로 노조간부를 엮어 전근대적인 노무 관리를 해온 인사노무관행이 본질적인 문제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26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회사의 전근대적인 노무 관리를 지적했다. 그러나 전근대적 노무관리에 포섭된 대기업 노조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때문에 대기업 노조의 문제점을 기업별 노조의 한계에서 찾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벽 안에 갇혀있게 되면서 회사에 자연스럽게 포섭된다는 것이다. '식칼테러'에 맞서 싸우며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열었던 대기업 노조가 지금은 회사의 세련된 노무관리에 맥을 못추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대자동차, 기아차, 대우조선, 쌍용차 노조 등은 산별노조가 아니라 여전히 기업별 형태로 남아 있다. 몇차례 산별노조로 전환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이를 두고 노동계 내부에서는 회사의 집요한 반대도 있겠지만 노조 집행부가 기득권을 놓고싶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금속노조의 한 관계자는 "기업별 노조이기 때문에 산별노조가 강제할 규정이 없다"면서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기업 노조의 산별 전환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아차 노조 사태를 노조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치열한 내부토론을 통해 구체적인 혁신 방안 마련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위원은 기아차 노조의 인사청탁 비리는 한국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와 함께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이 연구위원은 "민주노조 운동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업별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과 함께 정책능력 개발과 자정노력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대기업 노조가 과연 어떤 해법을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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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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