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29회(5부 : 캠퍼스 연가 2)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2.13 23:01수정 2005.02.1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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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원래 김광균과 김영랑, 그리고 청록파 시인들을 좋아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김수영 시가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현실 참여적인 시들에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서로 노진이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암송하였다. 의대생이 저런 시를 다 알고 읊기까지 하다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감탄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영희는 김현승의 '눈물', 김춘수의 '꽃'을 촉촉히 젖은 목소리로 읊었다. 진경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과 "한 잔의 술을 마시고"로 시작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허스키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암송했다.

다음으로 한철이 녀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를 더듬더듬 거리다가 도무지 못하겠는지 정몽주의 '단심가'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온몸으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함께 암송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기,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아무래도 시낭송은 한철에게는 무리이자 고역이었나 보다.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몇 번 하던 녀석은 뭐 재미있는 거 없느냐고 했다.

"그럼, 우리 이번에는 성명(姓名)과 관련시켜 언어 유희, 다시 말해 말장난을 한번 해 볼까?"

나의 제안에 모두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려, 내가 먼저 성씨와 직업을 연관지어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왜 사건, 사고가 나면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잖아. 그런데 그런 자리에 가면 아주 흥미 있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쪽에선 이기자! 이기자! 그러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기자! 주기자! 그러는 거야. 왜냐하면 이씨가 기자가 되면 이기자가 되고 주씨가 기자가 되면 주기자가 되기 때문이지."

모두들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았다.

"그러면 안씨가 기자가 되면 안기자가 되고, 남씨가 기자가 되면 남기자가 되고, 우씨가 기자가 되면 우기자가 되고, 사씨가 기자가 되면 사기자가 되고, 소씨가 기자가 되면 소기자가 되고, 박씨가 기자가 되면 박기자가 되겠네요?"

역시 언어를 전공하는 사람답게 영희가 재치있게 말을 받았다.

"야, 그럼 할 수 있다면 모두 박씨들로 하여금 기자를 하라고 해야겠다."

노진의 말에

"그건 또 왜요?"

진경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노진의 대답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박기자! 박기자! 그래야 세상이 바뀔 것 아냐!"

"말 된다. 말 돼!"

내가 응수하자, 한철도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백씨가 기자가 되는 것이 좋겠는데, 그래야 백기자!(벗기자)가 되지."

"하여간 네 머리는 한쪽으로만 돌아요. 천재다 천재!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해 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니까."

노진이 칭찬인지 욕인지 그렇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따져 들어가면, 문기자는 뭉게자가 되고, 천기자는 챙기자가 되겠네요?"

진경도 그렇게 말하며 한몫 거들었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0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현직 국어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현직 국어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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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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