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31회(5부 : 캠퍼스 연가 2)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2.19 11:16수정 2005.02.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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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잘 듣기나 해, 임마, 왜 신라에 박씨 석씨 김씨 3성이 왕을 돌려가며 한 적이 있잖어. 그럼 박씨 마지막 왕들의 이름이 뭐 게?"

"박씨왕들의 마지막 이름? 그런 게 다 있었니? ‥‥혁거세, 마립간, 차차웅은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는데?‥‥‥"


나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젓자 한철이 답을 얘기했다.

"내가 알기론 6대 왕인가가 '지마'고, 7대 왕이 '아달라'지 아마."

"그럼, 박. 지. 마. 왕과 박. 아. 달. 라. 왕?"

노진이 여자들을 의식한 듯 제가 말을 뱉어 놓고는 주워 담을 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자들의 반응은 각각이었다. 진경은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고, 영희는 살짝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고, 그리고 초희는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 이름이 왜? 어디가 어떤데?"


하면서 되묻는 것이 아닌가. 나도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초희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영희가 입을 열었다.

"성은 어렵더라도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법적 제도를 마련해야 겠네요. 우리는 여지껏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얼마나 놀림을 받겠어요. 또 그 고통은 얼마나 크겠어요. 본인이 갖고 싶어 갖은 성도 아니고 이름도 그렇고."


"아니에요. 언젠가는 성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고, 이름은 당장이라도 고칠 수 있게 해야한다고 봐요."

내가 그렇게 얘기를 하자 말을 자르면서 한철이 끼어 들었다.

"성을 바꾼다? 그럼 성전환수술이잖아."

녀석의 엉뚱한 말장난에 이번에는 모두 우- 하며 야유를 보냈다. 다시 내가 본 궤도로 돌아와 계속 견해를 피력하였다.

"우선은 부모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아이들 이름을 지어야 할 것 같아요. 뜻이 좋다고 해서 '선록'처럼 발음도 하기 어려운 한자로 이름을 짓는다거나 반대로 또 한글 이름이 무조건 좋다고 지어 놓고 보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죠. 예를 들면 요즘 꽃님, 별님이라는 이름도 제법 있는데 어렸을 때는 얼마나 귀엽고 좋아요. 하지만 그들이 장성해서도 이꽃님 여사, 김별님 할머니, 그러면 조금은 가벼워 보이지 않나요."

한자 이름이 어쩌고 한글 이름이 저쩌고 하고 있을 때, 노진이 한철에게 복수할 기회라고 포착한 듯 공격을 가했다.

"맞다 맞아. 여기 메뚜기 녀석도 왜 그런 별명이 생겼게요. 모두 한철이라는 이름 때문이에요. 메뚜기도 한철이다 뭐 그래서 생긴 거지요."

"아, 그랬어요. 저는 지금까지 생김새 때문에 붙은 별명인지 알았어요."

영희의 말이다. 사실 잘 생긴 얼굴에 180이 넘는 훤칠한 키 등 외적인 조건으로만 보면 우리 3인방 가운데 한철이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 녀석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다.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눈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안경을 쓰면 정말 메뚜기처럼 보였다. 고교 때 한번 선글라스를 쓰고 왔다가 한철이라는 이름과 함께 외모까지 연관지어 '메뚜기'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녀석은 다시는 선글라스든 뭐든 안경처럼 생긴 것은 쓰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있었다.

"너 이 녀석,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끌고 들어가고 그래. 오늘은 이래저래 성, 이름 모두 다 수난을 당하는 날이구나. 그러면 수난 이대가 아니고, 수난 두개가 되는 거냐. 아, 아부지!"
녀석의 익살스런 탄식에 노진이 끝까지 공격의 수위를 멈추지 않았다.

"야 임마, 왜 자꾸 아부지래. 그건 영희씨 특허라니까."

"하하하, 호호호."

모두 파안대소하였다. 나는 한철이만 너무 집중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것 같아 녀석의 짐을 좀 덜어줄 요량으로 나의 이름에 관한 비밀을 공개했다.

"나의 원래 이름은 수태야. 김수태. 족보에 분명히 그렇게 올라 있지. 시골집에 내려가면 할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수태라고 부른다니까. 할아버지 항렬은 '배'고, 아버지 항렬은 '종'이고 내 항렬은 '태'야.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없는 태가 없지. 갑태로부터 시작해서 을태, 병태, 정태, 무태, 기태, 경태, 신태, 임태, 계태, 상태, 완 태, 성태, 종태, 유태, 원태, 운태, 준태, 승태, 인태, 선태, 용태‥‥‥ 등 하여간 동태, 생태, 명태, 청태만 빼놓고는 다 있다니까.

글자 하나만으로 이름을 짓되 집 안 친척 중 누구와도 겹치지 않도록 하다 보니 수태가 된 것이지. 하지만 사내 이름으로 적합치 못하다고 판단한 우리 아버지가 주민 등록 상에는 철민이라는 새이름을 지어 올렸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모두 철민이라고 부르더라구. 그때는 철민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수태라는 이름이 그래."

"뭐, 네 이름이 원래 김수태였다구. 남자 이름이 수태, 수태라구!"

역시 한철이 녀석이 너무 좋아했다. 모두들 큰소리를 내어 마음껏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 웃어서 배가 다 아팠다.

어느새 별빛도 웃다가 지쳤는지 잔디밭에 내려와 이슬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한철의 성화로 수업이 없는 토요일을 잡아 무주구천동에도 갔다 오고, 금산에 있는 서대산 등반도 다녀왔다. 등산은 확실히 사람들을 가깝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손을 잡게 되어서 그런지 이후로는 초희와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초희는 말을 놓으라는 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철민씨, 이것 좀 봐요' 하는 식으로 여전히 말을 높이고 있었다.

대학 1학년 2학기도 낙엽 따라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상자 속의 물건들이 하나씩 나와서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은반지는 내가 그녀를 만난 100일 기념으로 시내를 갔다가 어느 금은방에 들러서

"우리들의 순결한 은빛 사랑을 위하여!"

하면서 둘이 하나씩 나누어 낀 것이다.

이번에는 녹음 테이프다. 대학 2학년 축제 때, 나와 초희가 학내 가요제에 참가하여 금상을 수상했는데, 연습할 때 기념이 될 것 같다며 그녀가 영희에게 부탁해 몇몇 곡을 녹음을 한 것이다. 테이프를 꺼내 녹음기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나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둘 다섯의 '밤배'를 부르고 있었다. 10년이 훨씬 지나 테이프가 약간을 늘어지긴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재생! 재생! 그녀도 이 테이프처럼 재생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그런 상식 밖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32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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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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