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없이는 산에 오를 수 없습니다

내가 배낭을 메는 이유

등록 2005.01.30 14:28수정 2005.01.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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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토요일 '비움 산수회'의 산행이 예정되어 있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작년부터 한 달에 두번 꼴로 토요일에 산행을 시작했는데 이번이 벌써 열세 번째 산행길이다. 무엇이든 시작해 놓으면 이렇게 연륜이 쌓이는구나! 옛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비움산수회의 회칙은 단 한 줄밖에 없다. '아무리 가깝고 낮은 산을 오를 때에도 반드시 배낭을 멘 후라야 비로소 오를 수 있다'가 그것이다. 그 이유는 욕심을 비우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도 모르게 쌓인 세파의 찌든 때를 배낭 속에 담아 산행길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덜어내고 그 속에 신선한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리고 넉넉한 여유까지 채워 하산한 후 다음 산행 때까지 또 열심히 살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a 미황사와 달마산이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로 걸려 있다. 사진은 작년 가을에 찍은 것입니다.

미황사와 달마산이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로 걸려 있다. 사진은 작년 가을에 찍은 것입니다. ⓒ 한석종

이번 산행지는 해남 미황사 달마산으로 절과 산 이름이 불교 색채가 짙게 드리워져 왠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어 택했다. 두 시간 반 이상을 차로 달려 미황사 입구에 접어들었다. 진입로가 너무 협소하고 빈약하여 절의 규모를 짐작케 했으나 막상 절에 도착하니 상당히 크고 역사가 깊은 절임이 느껴졌다. 회원들은 미황사와 달마산이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음에 탄성을 지르며 산사의 고요한 정적을 일순 깨뜨렸다.

절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산행 길을 잡았다. 산행 길은 고요했고 회원들은 배낭 속에 담아온 세속의 번뇌를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나 비워내고 있는 건지 도통 말이 없다. 사십여분쯤 오르다 가빠진 숨을 고르기 위해 널다란 바위에 걸터앉았다. 회원 한 명이 대잎차를 꺼내 한 잔씩 돌렸다. 차 향을 음미하며 한모금 적시자 대나무의 허심이 전해져 온 탓일까? 금방 속이 한결 개운해진다. 뱃속은 참으로 약삭 빠르다는 생각이 스친다.

산은 예상보다 높거나 급하지 않다가 팔부능선에 이르자 암벽이 나타났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급경사를 이루며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 이걸 어떻게 오르나 궁리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동앗줄이 내려오듯 한켠에 밧줄이 매달려 있다. 밧줄에 체중을 싣고 공중에 몸을 띄운다. 지난 산행 때보다 체중이 더 불었다는 느낌이 소주 첫잔을 비울 때처럼 선명하다. 분명 욕심이 더 늘었으리라.

이내 산 능선이 나타났다. 능선에 올라 앞을 보니 지척에 뿌연 안개 속에 바다가 숨어 있다. 탁탁한 마음이 걷히고 시원하게 확 트인다. 산과 바다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양수겸장하듯 이렇게 바로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닐진데 달마산은 우리에게 이를 너무 쉽게 허락한다. 우리는 달마산의 넉넉한 품으로 깊이 빨려 들었고 달마봉에 홀린 듯 그곳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순전히 능선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병풍을 둘러쳐져 있어 손발과 밧줄에 의지해야만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수 있어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했다. 구름에 휩싸인 달마봉을 떠올리며 그곳에 오르면 달마대사의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힘드는 줄 모르고 올랐다. 그런데 막상 달마봉에 오르자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눈앞에 펼쳐진 것은 땅을 뚫고 일제히 고개를 쳐든 보리밭과 그 너머로 파도만이 잔잔하게 일렁일 뿐, 잠깐 허전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이내 다른 생각이 차오른다. 그렇구나! 비움 그 자체가 더 없는 아름다움 아니더냐!

우리는 달마산 봉우리 큰 바위 밑에 자리를 깔고 각자 싸온 도시락을 풀었다. 사람의 개성만큼이나 각자 싸온 음식의 종류나 맛도 달랐다. 일곱 사람 모두 싸온 음식은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후식으로 준비해 온 차와 주류도 각각 달랐다. 점심을 먹으며 삶의 지혜를 또 하나 얻는다. 각자 싸온 음식 맛이 각기 다르듯 사람의 생각도 똑같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부터라도 타인을 좀더 이해하려는 마음의 폭을 더 넓혀야겠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반짝이던 하늘이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본격적인 비를 뿌리기 앞서 띄엄띄엄 빗방울 하나씩을 전령처럼 내보내고 있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하산할 준비를 했다. 이렇게 자연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때는 반드시 예비 신호를 내보낸다. 방자하게 우리 인간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애써 모른 척하고 제 방식대로 행동함으로써 더 큰 재앙을 맞는 건 아닐까?


하산 길에 이제 초입에 오르는 몇 사람의 등산객들과 목례를 나누며 비켜갔다. 등산할 때는 하산할 때보다 늘 산뜻한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된다. 하산 길에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큰 나무 그늘에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마음으로만 가져온 생각을 오늘 회원들에게 풀어내기로 작정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 나이가 사십 중반을 넘겼으니 인생을 좀 알 만한 나이가 아니냐?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남을 위해 뭔가 봉사하며 살아가야겠다 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 비움산수회에서 매달 회비를 조금씩 모아 마음의 손길을 시각 장애인들에게 내밀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나와 똑같은 생각을 전부터 품고 있었다. 다들 마음 속에 온기 하나씩은 품고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마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몰랐고 바븐 일상에 파뭇혀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꺼내지 않았어도 조만간에 누군가 분명 앞장섰을 터인데 내가 먼저 선수쳐서 괜시리 겸연쩍었다.

지금까지 산행 중에서 이번 산행이 가장 뱃속이 편안한 산행이었다. 미황사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에 오르자 차창 밖으로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비움 산수회는 아무리 가깝고 낮은 산을 오를 때에도 반드시 배낭을 메고 산행한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쌓인 세파의 찌든 때를 배낭 속에 담아 산행 길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덜어내고 그 속에 신선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넉넉한 여유까지 채워 하산한 후 다음 산행 때까지 또 열심히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진정 비움이 더 없는 아름다움이므로.

덧붙이는 글 비움 산수회는 아무리 가깝고 낮은 산을 오를 때에도 반드시 배낭을 메고 산행한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쌓인 세파의 찌든 때를 배낭 속에 담아 산행 길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덜어내고 그 속에 신선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넉넉한 여유까지 채워 하산한 후 다음 산행 때까지 또 열심히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진정 비움이 더 없는 아름다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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