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환청심환 먹으면서 오른 '눈꽃' 한라산

폭설이 내린 한라산을 올랐습니다

등록 2005.01.30 12:56수정 2005.01.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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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구름이 백록담을 감싸고 ⓒ 강석인

한라산은 낭만과 추억이 서린 곳

1975년 1월 한라산에 엄청난 폭설로 등반객 3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다음날 성판악에서 늦은 오후 시간대 등반 통제 구역을 뚫고 한라산으로 잠입했으나 백록담에 도착한 친구가 무리한 산행으로 탈진, 고생한 경험이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제주 여행을 하면서 결혼하면 제주로 꼭 신혼여행을 오자고 약속을 해 놓고, 8년이 지난 1983년에야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신혼여행을 와서 그 당시 한라산 겨울 등반 이야기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새 삶을 설계했다.

결혼 후 15년이 지난 1998년 1월 아내와 중1, 초등학교 5학년의 시원, 시내와 동행, 한라산 산행에 나섰다. 하지만 과거와 흡사한 일기와 폭설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주에서 꼬박 이틀을 기다리다 등반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렇듯 한라산은 내게 낭만과 사랑을 안겨 준 남다른 추억이 서린 곳이다.

나는 '성지산우회' 회원이다. 지난 연말 새로 선출된 성지산우회 집행부는 분기마다 테마 산행을 예고했고, 1월 23일 일요일 한라산 눈꽃산행을 결정했다. 산행 전날 영실, 어리목 등 관리사무실에 현지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 한라산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06:40 회장 부부와 제일 먼저 도착하니 김해공항 대합실은 썰렁하기만 하다. 몇 분 간격으로 20명의 회원들이 속속 도착하여 배낭과 등산화까지 벗는, 엄격한 보안 검색을 거친 후에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07:30안개 자욱한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금세 구름 바다를 뚫고 나와 햇살을 싣고 날았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운무 가득한 제주는 방향 감각 마져 상실케 한다.

운무 속 터널로 설국의 깊은 수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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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 낀 설원 ⓒ 강석인

09:00 미리 대기하던 관광버스에 올라 1100도로에 오르니 운무는 더 짙게 드리워져 시야를 가리고 쌓인 눈은 깊어만 간다. 어리목 대피소 입구에 체인이 없는 차량이 뒤엉켜 더 이상 진행이 어렵다. 영실 들머리 코스를 포기하고 차에서 하차, 어리목 방향으로 코스를 변경했다. 눈 덮인 도로를 따라 20여분 진행하니 대피소에 도착했다.

10:30 인원을 체크하고 본격적인 등산로에 접어드니 온통 회색빛 세상이 전개된다.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오갔는지 눈으로 깊게 덮인 등산로는 잘 러셀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운무 속 터널로 설국의 깊은 수령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아, 온통 눈 세상이구나! 백설은 한라의 모든 만물과 세상의 찌든 때까지 두껍게 덮어 버렸다. 연발하던 감탄사는 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뿌연 입김을 내뿜으며 가쁜 숨소리로 변한다. 짙은 운무는 귀와 눈을 멀게 할 듯 설산의 정적은 이어지고 이따금씩 나뭇가지 설화편이 우두둑 목덜미에 떨어져 정신을 가다듬게 한다.

사색은 눈 덮인 겨울산이 제격

눈 덮인 겨울산을 찾아 사색에 빠져 보는 것도 인생에 있어 남다른 여유와 즐거움이 아닐까?. 자칫 궁상맞게 비쳐질지도 모를 사색은 이런 눈 덮인 포근한 겨울산이 제격이다. 일상은 번뇌의 연속이고, 고단한 삶이다. 바쁜 일상에서 빠져 나와 잠시 사색하며 자신을 돌아 볼 기회를 갖다 보면 지친 삶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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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 걷히며 설화 사이로 햇살이 ⓒ 강석인

계속된 오르막을 1시간 30여분 올랐을까?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와 반사되고 있다. 서서히 운무가 걷히며 하늘이 파랗게 변해 갔고 눈꽃은 또 다른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선두에 서서 후미와 간격을 좁히며 카메라에 풍경을 담고 있는데 후미 김명섭 회원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전갈이 왔다. 회장이 너무 힘들어 시간이 지체되고, 일일회원으로 참석한 부부는 상태가 좋지 않아 하산을 한다고.

먼저 간 회원들을 휴대폰으로 연결해 보지만 불통이다. 김명섭, 이숙기 회원에게 중간과 후미를 맡기고 먼저 간 회원들을 사제비 동산에서 만나 더 이상 진행을 중지시켰다. 한참을 기다리니 회장님이 기진맥진 도착하고 하산한다던 일일 회원도 우환청심환을 먹고 기운을 되찾았다며 뒤늦게 합류했다. 모두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설국의 장관은 대자연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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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얀 단색의 조화 ⓒ 강석인

12:00 사제비 동산은 순백 설원과 에메랄드 빛 하늘이 맞닿아 설국의 장관을 보여 준다. 하얀, 파란 단색이 만들어낸 조화는 속마음까지 텅 비우게 하고 발아래 포근한 솜구름은 세상사에 지친 육신을 던져 보라는 듯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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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 구름을 비집고 ⓒ 강석인

기념 촬영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니 목적지를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좌측은 순백의 설원이 청명한 하늘과 맞닿아 있고 우측 능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백록담으로 길을 턴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장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폭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한 장 사진으로 담아 낼 수 있을까…. 이런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는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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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 피어 오르는 뭉게 구름 ⓒ 강석인

신이시여! 저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주려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리게 했나요.

주변에 펼쳐진 비경을 잡으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다 보니 백록담을 감싸고 있던 띠구름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청명하던 하늘은 금세 운무로 가득 채워진다.

13:20 어리목에서 윗세 오름대피소까지 4.7㎞를 3시간 걸렸으니 예상보다 1시간 가량 지체된 셈이다. 대피소 안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고 곳곳에 무리지어 푹신한 눈 위에 퍼질러 앉아 음식을 서로 권하며 도란도란 정을 나눈다.

배려하는 마음이 진정한 산객들의 아름다운 모습

맛있는 음식을 서로 나누고, 산을 오르며 힘들어 하는 자를 위해 길을 터 주고, 힘이 남는 자 지친 자를 이끌고 가는 모습에서 산을 닮아 가고 있는 산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산을 오르며 산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 자신만을 위해 아등바등 대던 걸 깨닫게 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배우게 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이게 진정한 산객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산신제를 올리며 무탈산행을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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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 오름에서 제 올리고 ⓒ 강석인

눈 덮인 한라산에 신이 산다고 영주산이라 했던가? 정상을 향해 고사를 지내며 한라산 신령님께 올 한해 무탈 산행과 소망을 빌어 본다. 설원에 둘러 앉아 따끈한 컵라면을 놓고 곡차 한잔 들이키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산행 중 준비해 간 음식을 먹는 맛…. 이 또한 산행에 있어 색다른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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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군락지 속으로 ⓒ 강석인

14:00 영실 방면 하산 길도 어리목에서 오를 때와 마찬가로 짙은 운무로 쌓여 있다. 겹겹이 쌓인 눈을 힘겹게 이고 선 주목 군락지. 미로같은 주목 사이를 걷다가 문득 포근한 이 눈 속에 파묻혀 한동안 세상을 잊어 봤으면 하는 사치스런 생각도 해 본다.

주목 군락지를 벗어나자 천길 낭떠러지 절벽을 끼고 등산로가 이어 진다. 산봉우리에 드리워진 운무, 잿빛 암벽에 쌓인 흰눈, 절벽 드리워진 수미터나 되는 고드름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엉덩이 썰매는 동심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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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 눈 그리고 고드름의 조화 ⓒ 강석인

14:30 좁은 등산로는 잘 다져져 있으나 한발만 옆으로 잘못 옮겨도 눈 속으로 허리까지 빠지고 만다. 절벽을 끼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등산로에서 썰매 타기는 자칫 큰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병풍바위를 지나 완만한 경사 길은 남녀 모두 엉덩이 썰매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여기 저기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아우성과 웃음꽃을 연발한다.

가파른 경사길이 시작되어 아이젠을 고쳐 매고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을 떼고 있는데 머리를 앞으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일행을 발견하고 엉겁결에 큰 나무 앞으로 다리를 밀어 넣었다. 얼굴이 내 허벅지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다가 급경사 지점에서 가속력이 붙어 몸이 비틀리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다행이다.

세상살이 지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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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에 쌓인 영실 ⓒ 강석인

15:10 영실 대피소 앞. 예정보다 길어진 산행이었지만 20명 전원 무탈 산행을 기념하며 산행을 마감했다. 오늘 하루 잠시나마 설국을 찾아 대자연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조화에 감동하고, 자연과 동화되어 동심으로 돌아갔었다.

아쉬움에 뒤돌아 보니 한라산은 그 자리에 꿋꿋하게 말없이 서 있다. 삶에 지치면 언제든지 찾아와 저 넓은 품에 안겨 보라는 듯….

덧붙이는 글 | 컨디션이 나빠 힘들어 하면서도 끝까지 함께해 준 대정, 장미다발님 부부께 감사드리며 후미를 맡은 김명섭 회원님 고생하셨습니다.

덧붙이는 글 컨디션이 나빠 힘들어 하면서도 끝까지 함께해 준 대정, 장미다발님 부부께 감사드리며 후미를 맡은 김명섭 회원님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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