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삶은 감자 이야기

"복녀는 감독관에게 치마끈을 풀었지"

등록 2005.01.31 03:41수정 2005.01.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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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딸애는 유난히 과학과목이 약합니다. 나는 2학년 과학책을 쭉 훑어봅니다. 1학기 마지막 부분쯤에 생물이 있는데, 그 중에 ‘뿌리와 줄기 구분하기’에 감자가 나옵니다. 나는 딸애와 감자의 그림을 같이 보면서 수염처럼 잘게 여러 가닥으로 난 것이 뿌리이고, 우리가 보통 먹는 감자는 줄기부분의 일부가 녹말 등을 저장해서 부푼 덩이줄기이며, 뿌리의 일부가 땅속에서 커진 덩이뿌리인 고구마와는 뿌리털이 없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해 줍니다.


나는 마누라에게 감자를 몇 개 얻어서는 다시 딸아이에게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니 슬슬 감자가 먹고 싶어집니다.

“마누라! 우리 오늘 감자나 삶아 먹읍시다.”

마누라는 감자를 가져와서 껍질을 벗깁니다.

“우리가 삶아먹는 감자는 껍질이 매끈한 감자보다는 이렇게 보풀보풀 나 있는 것이 파삭 파삭해서 맛이 있어요. 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솥에다 감자가 조금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중불에 끓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어요. 감자는 칼륨이 많아서 소금을 넣고 삶아야 해요. 감자에는 나트륨이 없으므로, 소금은 그야말로 감자와 천생연분인 셈이지요.”

마누라는 솥에 감자를 안치고, 나는 다시 딸아이에게 감자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읽었던 소설에 ‘김동인 선생’이 쓴 ‘감자’가 있었어.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주 가난한 농사꾼의 딸인 복녀가 게으르고 나이 많은 노총각에게 돈을 받고 시집을 갔는데, 그 신랑이란 작자가 워낙 게을러서 땅주인들이 소작조차 주지 않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빈민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빌어먹다가 어느 날 송충이 잡이를 가게 되지요. 복녀는 열심히 송충이는 잡는데, 옆에 같이 간 빈민굴 아낙들을 보니 송충이는 안 잡고 감독관하고 잡담만 늘어놓는데도 저녁때 일당을 계산할 때 보니 오히려 그 여편네들이 돈을 더 많이 타가는 거야.”


“왜 그랬어요?”

딸아이는 이제 눈이 반짝거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감독관이 복녀를 불렀어요. 복녀가 그 감독관들을 따라 가서 치마끈을 풀었어. 그날부터 복녀도 놀고도 돈을 많이 타는 그 부류에 속하게 됐지. 이때부터 복녀의 인생관이 변하는 거야. 복녀는 비렁뱅이든, 누구든 지간에 돈만 된다 싶으면 치마끈을 풀어 젖히는 거야. 그런데 천성이 못난 그 서방은 나무라기는커녕 돈을 벌어다주는 그런 복녀를 좋아했지. 그러다가 왕 서방의 농장에서 감자를 훔치다가 복녀가 잡히는데, 이때도 복녀는 치마끈을 풀었어. 복녀의 얼굴이 반반했던지, 그 날 이후 왕 서방은 복녀에게 빠졌는지 자주 어울렸대요. 왕 서방 집에도 가고 어떨 때는 복녀 집에도 어울리기도 했지.”

“복녀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타락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지 않는데요.”

딸아이는 제법 복녀에 대해 질책을 합니다.

“그러다가 왕 서방은 돈을 주고 새색시를 들여오는데, 복녀가 눈이 뒤집히는 거야. 그래서 그 색시 오는 날, 낫을 들고 왕 서방에게 갔다가 오히려 왕 서방에게 낫으로 찔려 죽임을 당하지. 며칠 후에 왕 서방은 복녀의 신랑과 의사에게 돈 몇 푼을 주고 뇌일혈로 죽었다는 병명으로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나게 되지, 아마”

이제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납니다. 마누라는 젓가락으로 감자를 찔러봅니다.

“감자가 80%정도 익었다 싶으면 이제 불을 낮추어야 해요. 그리고 다시 약한 불에서 다시 서서히 삶아야 돼요.”

마누라는 불을 줄입니다.

맛있는 삶은 감자
맛있는 삶은 감자한성수

“시대상황이나 그가 처한 환경이라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아버지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봐요. 가령 농사꾼의 딸인 복녀가 게으른 남편 대신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면, 그처럼 쉽게 타락하지는 않았겠지!”

“너는 뚱딴지란 말을 들어 보았느냐?”

딸아이는 ‘웬 뚱딴지냐’며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뚱딴지란 돼지감자라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배가 고파 캐먹은 적도 있었지. 그 모양이 울퉁불퉁, 하도 이상야릇하게 생겼는데, 지금은 길가에 있어도 구분해 낼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 놈도 감자처럼 덩이줄기인데, 당뇨병에 좋다고 알려져 있단다.”

이제 물이 거의 졸아 있습니다. 남은 물을 쏟아 붓고는 뚜껑을 열어 수분을 모두 증발시킨 후, 마누라는 솥을 들어 키질을 하듯이 감자를 탁탁 추어올립니다.

“이렇게 하면 감자끼리 부딪혀서, 파슬파슬하게 보기도 좋고 맛도 있어 보이지요.”

마누라는 다시 솥에 얹었다가 잠시 후 꺼내어 접시에 담습니다.

나는 감자 한 개를 쪼개어서 입에 넣어 봅니다. 담백한 맛이 혀끝을 간질입니다. 아이들도 서둘러 입으로 가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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