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로 다가온 불교가 내게 안긴 생소함

인도 보드가야 - 티베탄 명상센터에서 보낸 열흘 2

등록 2005.01.31 14:54수정 2005.02.0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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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26일 일요일 맑음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 오늘 아침엔 여러 명이 명상 시간에 안 나왔다. 게으름 피지 않기 위해 아직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늘 오전 강의는 업에 관해서였다.

'업은 피할 수 없다. 업은 확대재생산 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우리가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업은 많은 생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사는 게 무서워졌다.

아이들이 질문한다.

"집착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느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집착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스님이 답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우린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데, 사랑은 오직 상대의 행복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집착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원하는 마음이고,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자비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없애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다."


오늘 토론 시간에 문득 든 생각.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 수련회에 따라가 통성기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한 생경함과 당혹스러움.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불편하다.

내가 불교에 마음이 끌린 건 두 가지 이유였다.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해 온 전쟁과 살육을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 신의 대리자가 필요 없다는 것.

행복과 불행 모든 것이 마음자리 놓기에 달려 있고,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스스로의 성찰과 수행일 뿐이라는 것, 그게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삶의 철학으로 불교에 끌렸을 뿐, 종교로서 불교에 대해서는 관심밖이었던 셈이다. 그런 내가 절간에 들어와 종교로서 불교를 접하자니 불편함과 어색함이 따르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아무 말이나 턱턱 믿어버리는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 걸까? 왜 늘 의심하고, 회의하는 쪽인 걸까? 대학 시절, 주위의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이념에 경도되었을 때 나 혼자 그러지 못했고,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도 그랬고, 종교에 대해서도 그렇고. 때로는 나도 그냥 찰떡처럼 쉽게 믿어버리고, 그 믿음에 온 생을 거는 사람이고 싶다.

윤회와 환생.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아는 린포체들의 이야기. 전생에 대한 기억. 이런 이야기들은 내게 여전히 거짓말처럼 들린다.

나에게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의 윤회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삶이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기에 살아간다는 건 이미 충분한 축복이다. 왜 윤회를 두려워해야 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불교로 귀의하지 않아도 다른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사랑하며 인생의 모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긍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데!

오늘의 투덜이 질문.

"왜 중들에게는 성행위가 금지되어 있나? 승단의 계율 중에 하루에 한 끼 먹는 것 같은 건 참을 수 있는데, 성행위가 금지되어 있다는 게 출가하는 걸 어렵게 한다. 성행위가 왜 나쁜 건가?"

스님의 답.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성행위는 임신과 출산, 가족의 형성을 뜻하므로 구도자로서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집착을 낳으므로 금지시킨 것 아닐까?"

니키가 물었다.

"집 앞에 벌집이 있어 오갈 때마다 쏘인다면 죽여도 되는가?"
"죽이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고도 안 될 경우, 자신이 하려는 일을 자각하고 그로 인한 업을 달게 받겠다고 인정하고 죽인다. 그 후에도 그 업을 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많은 생물을 죽이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 속의 미생물부터, 우리가 먹는 음식을 통해서도, 걷는 발걸음을 통해서도. 인간인 이상 살생은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업이므로 끝없이 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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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에 세운 대탑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에 세운 대탑김남희
2004년 12월 27일 월요일 맑음

오늘부터는 저녁 먹고 나서 또 명상이다. 고통 받는 가족과 친구, 세상의 모든 존재를 주변에 둘러 세우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부처의 빛과 자비가 그들 모두의 고통을 없애고 정화시켜 주는 것을 시각화하는 명상.

명상이 끝난 후 스님께 여쭈었다. 고통이 왜 나쁜 거냐고, 고통은 늘 나를 성장시켜왔고, 내게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었다는 내 질문에 스님은 대답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의미 없는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잘 극복해내지 못한다고.

사랑하지 않으면 집착도 없는 것 아니냐고, 예전에 나는 사람에게 무척 집착했는데 어느날 보니 그 집착이 너무도 많이 사라져 가끔은 내가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지 슬퍼질 때가 있다는 내 질문에 스님이 말씀하셨다.

"집착이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개념이다. 사랑은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집착은 나를 중심에 놓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집착이 없어진다는 건 당신이 성장한다는 뜻이고 부처의 마음에 점점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단 집착이 없어진 건지,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지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회색 장삼을 입은 스님이 1보1배를 하며 대탑 주위를 돌고 있다.
회색 장삼을 입은 스님이 1보1배를 하며 대탑 주위를 돌고 있다.김남희
2004년 12월 28일 화요일 맑음

아, 오늘 아침 강의. 미치도록 지루하다. 계속 딴 생각에, 딴청을 부리는 지금. 시간은 거의 멈춰 있다.

오늘 강의의 주제 : 스승이나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거나 따르지 말고 스스로 확인하고 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부처를 죽여라!

수업 시간에 기침 하는 날 본 페드로가 내 손에 목 캔디 몇 알을 쥐어주었다. 전에 그가 기침할 때 내가 목 캔디 몇 알을 건네준 일이 떠올라 둘이 미소를 주고받았다.

저녁 식사 후 비디오로 텐진 빼마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를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기대를 가지고 지켜봤다.

'마음의 본성(The nature of mind)'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강의는 쉽고 간결해 쏙쏙 귀에 들어왔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데는 수많은 시간을 쓰면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시간을 쓰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쓰레기가 가득 찬 집, 더러운 물로 가득 찬 컵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한 여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생각에서 빠져나와 물러 앉아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과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다르다. 파도 위에서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서퍼처럼 마음의 바다에서 서퍼가 되어야 한다.

감정, 생각, 느낌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나라고 생각하고 규정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고, 집중하게 하는 법을 배우면 마음을 이용하고 조종할 수 있다. 우리가 외부 세계라고 인식하고 믿는 모든 것이 단지 마음의 게임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를 뿐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 할 것.'


불전에 바쳐진 조각들은 모두 버터로 만들어졌다.
불전에 바쳐진 조각들은 모두 버터로 만들어졌다.김남희
2004년 12월 29일 수요일 맑음

종일 앓아누웠다. 어제 오후부터 미열이 있더니 결국 감기 몸살이 시작됐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이곳 방이 감기를 불러들인 걸까? 오전엔 올가가 차와 물을 가져다 주고, 현경이가 들러서 밥을 갖다 주었다.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좀 괜찮은 것 같아 오후 명상에 들어갔다. 목 뒤부터 온 몸에 통증이 시작되고 기침이 터져 나와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더니 시험을 앞두고 학교에 못 가고 있는 학생 기분이다.

2004년 12월 30일 목요일 맑음

오늘은 출가한 스님들을 따라 하루 종일 계율을 지키는 생활을 경험하는 날. 다른 건 다 괜찮은데 12시 전에 한 끼만 허용되는 식사가 마음에 걸린다.

오전에 카르마파가 센터를 방문했다. 아침부터 절 마당에는 티베트 불교를 상징하는 여덟 가지 성물이 그려지고, 기도 깃발을 다시 달고, 법당 내부를 새롭게 정비하고, 오전부터 다들 카타(큰 스님께 드린 후 축원을 받아 다시 돌려받는 흰 비단 천)를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 어린 카르마파에게 서양인 노스님들이 얼마나 허리를 굽히는지 그걸 보던 나탈리가 "완전히 신이네"라며 한 마디 한다.

저녁에는 마하보디 절에서 촛불 공양이 있었다. 미처 초를 준비 못한 내게 프레드릭이 절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 절반을 나는 다시 페드로와 나누었다. 고요한 마음으로 초 네 개에 불을 붙였다.

첫 번째 초는 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두 번째는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과 고통 없는 삶을 위해, 세 번째는 내가 모르는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의 고통없는 삶을 위해, 네 번째는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을 위해 기도하며 불을 밝혔다.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지각 있는 생명들의 고통 없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내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우리들 모두의 염원을 담고 타오르는 촛불은 밝고 아름다웠다. 릭샤를 타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내가 밝힌 촛불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다.

루트 인스티튜트의 열흘짜리 명상 강좌에서 명상 중인 수강생들
루트 인스티튜트의 열흘짜리 명상 강좌에서 명상 중인 수강생들김남희
2004년 12월 31일 금요일 맑음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열흘 간의 과정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아침 명상을 하면서 발견했다. 이제 다리의 고통 없이 바른 자세로 한 시간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10분도 힘들었는데. 아침 식사 후, 올리에게 '일상 생활에서의 불교'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

행복이나 불행,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올리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말해주었다. 자신이 직장을 잡아주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준 친구-그 친구의 직업은 명상 지도 강사였다-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후 모든 마음의 평화와 자비심, 사랑이 다 흔들리고 깨졌던 일.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 후 끝내 모든 원망과 미움을 극복하고 그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일을 이야기한 후 올리는 말했다.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라.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하루 5분의 명상처럼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실천하라. 조금씩, 작은 것에서 시작해 오래, 자신의 호흡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열흘의 생활이 우리의 삶을 단번에 바꿀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 자신의 능력을 점검하고, 조금씩 시작하되, 규칙적으로 하라. 일요일에만 교회에 나가는 '선데이 크리스챤 (Sunday Christian)'이 되지 말자.'

열흘의 생활을 마치며 나의 신앙생활-그 시절이 그런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면-을 돌아본다. 개신교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닌 덕에, 그리고 지독한 '예수쟁이'였던 할머니 덕에 나는 일곱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로 가는 삶을 살았다.

물론 그 치열한 '주일 엄수'는 교회가 주는 부수적인 혜택-크리스마스와 여름 수련회, 시와 문학의 밤, 남학생들과의 합법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만남 등등-에 기댄 바도 컸다. 어쨌든 한때는 하나님의 큰 쓰임 받는 일꾼이 될 거라는 기대를 교회 안에서 받기도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나는 담배를 끊듯, 술을 끊듯, 그렇게 교회를 끊었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고, 나의 하나님만이 옳고 유일한 신이라는 편협한 믿음으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오만한 교회, 서로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경계를 나누어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며 기득권을 옹호하던 그 보수적인 세력이 싫었다.

그런 교회와 목사의 가르침은 내게 어떤 울림도 주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어 내가 만난 교회 바깥의 세상이 내게 교회 안에 머무르는 안온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야말로 나는 절이 싫어 떠난 중이었던 셈이다.

명상 및 불교 강좌가 1년 내내 진행되는 루트 인스티튜의 전경
명상 및 불교 강좌가 1년 내내 진행되는 루트 인스티튜의 전경김남희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내게 종교는 벽이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하고 강한 벽. 내 안에 이미 다른 벽과 틀이 있었기에 내게 더 이상의 벽은 필요하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 나는 어떤 종교에도 귀의하지 않았고, 물론 교회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십오년을 건너 왔다. 하지만 지금 내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위대한 종교,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에 가까이 가려는 열망으로 뜨겁다.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무리들, 절과 절에 머무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그들을 보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예수의 삶, 부처의 삶에 눈 돌리고 귀 기울이기 위해 혼자 가는 지금.

나는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예수는 결코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부처의 삶은 저자거리에서 미천한 중생들과 함께 한 것이었음을.

한 북미 인디언이 말했다.

'당신의 작고 낡은 자아를 위해 개인적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일종의 눈뜸이고, 되돌려 주는 것이다.'

열흘의 생활이 내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나를 종교에 귀의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명상을 통해 얻는 나의 밝고 맑은 기운이 내 이웃의 삶까지 평화롭게 할 수 있기를 꿈꾸어볼 뿐.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을 내 삶 속에서 따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만은 지키고 키워 나가고 싶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땅 보드가야에는 명상과 요가, 불교 교리를 배울 수 있는 센터가 많다. 루트 인스티튜트의 연락처는 아래와 같다.
www.rootinstitute.com 이메일 : rioffice@vsnl.net
전화 :0631(지역 번호)-2200-704
루트 이외에도 태국절과 국제 명상센터, 다르마 보디 명상센터 등에서 명상강좌가 열리며 대부분의 강좌는 10월부터 3월 사이에 열린다.

덧붙이는 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땅 보드가야에는 명상과 요가, 불교 교리를 배울 수 있는 센터가 많다. 루트 인스티튜트의 연락처는 아래와 같다.
www.rootinstitute.com 이메일 : rioffice@vsnl.net
전화 :0631(지역 번호)-2200-704
루트 이외에도 태국절과 국제 명상센터, 다르마 보디 명상센터 등에서 명상강좌가 열리며 대부분의 강좌는 10월부터 3월 사이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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