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수 신세가 될 뻔한 외갓집 가는 길

[설 특집 3]외갓집은 마음의 안식처요, 아늑하고 포근하다

등록 2005.02.05 16:14수정 2005.02.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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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는 눈이 꽤 많이 왔다. 어린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보다 눈 쌓인 설을 더 기다렸다. 섣달 그믐밤 흰눈이 논밭에 쌓여 있으면 어찌나 포근했던가. 마당과 지붕에도 눈이 녹지 않으면 행여 아래채로 단밥 그릇 들고 가도 넘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지역마다 풍습이 다르지만 내 고향 화순에서는 추석 때는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설날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차례와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조상님들 묘에 다녀와야 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집에서 뭉그적거린다면 정월대보름까지 호통을 들어야 하니 딴 맘먹지 않고 집을 나선다.

지금은 대형 저수지에 갇혀 버린 구불구불한 골짜기에 접어든다. 사람 한명씩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여섯 형제 자매들이 한줄로 쭉 늘어서서 성묘를 간다. 눈에 푹푹 빠지고 넘어지고 파묻힌다. 바람이 모이는 곳은 우리 키를 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형들이 내주는 길을 따라 목적지에 이른다.

정유재란 이후부터 조상들이 들어와 사신 덕에 물려 받은 벌초꺼리도 많았지만 찾아 뵈야 할 산소도 수십동이었다. 이산 저산 예닐곱 골짜기 냇가 건너고 산을 넘어 다니며 묘소에 이르면 다녀간 표시로 사람 숫자만큼 산에 있는 솔가지를 꺾어 쭉 깔아 놓고 절을 한다.

커가면서 “그냥 할아버지와 증조부만 찾아 뵙고 아래서 합동으로 드리자”는 제안이 심심찮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도 잔꾀를 부리거나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이토록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우리는 하루 꼬박 걸려 눈밭을 쏘다녔으니 오후 5시가 가까워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산에 다녀오고 나면 바로 퍼질러 자야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아버지 친구 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으니 아침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큰형과 작은형이 나이를 먹어가면서부터는 계를 치르니 심부름하느라 며칠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바로 옆집이 큰댁이었다. 큰며느리 없이 20년 넘게 사시며 아흔을 넘긴 할머니와 내가 한살 때 아내를 잃은 큰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자상하지도 않았다. 웬만해선 말씀이 없는 분이니 우린 쉬 주눅이 들기도 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고 집안에 온화한 기운도 없으니 인사만 드리고 우리 곧장 집으로 건너와 버리곤 했다.

섭섭한 정도로 치면 아예 발을 딛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린 우리가 어쩌다가 할머니 방에 가서 고구마라도 하나 화로에 올려 구워먹고 있노라면 인기척이 나기 무섭게 할머니가 “야야, 숨겨라”거나 “뒤안에 나가 있어라와”하시는 통에 우린 맨발로 뒤란에 덜덜 떨며 한동안 서 있기도 했다.


서러움, 멸시, 냉대와 홀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찌 누나 넷과 사촌형 그리고 큰아버지는 그리도 차가웠는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다. 할머니도 손자들에게 고구마 하나 맘대로 줄 수 없도록 나약하고 정나미가 떨어지게 사셨는지 모른다.

정 없이 모질게 대하시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사와 명절 때는 더 다투기도 했는데 늘 화근은 반가이 맞질 않고 밥 한끼 맘 편히 주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도 눈칫밥을 먹기도 한두번이지 어머니가 장만하는 제사 지내고 나서 음복도 하지 않고 집으로 와서 잠을 잘 때도 허다했다.

아이들에게도 외갓집이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저에겐 '외갓집' 하면 가슴이 싸해지면서 뭉클해집니다. 코피가 터질듯한 기분이지요. 올 설에도 꼭 다녀오렵니다.
아이들에게도 외갓집이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저에겐 '외갓집' 하면 가슴이 싸해지면서 뭉클해집니다. 코피가 터질듯한 기분이지요. 올 설에도 꼭 다녀오렵니다.김용철
이런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새해 덕담을 주시고는 “형제간 우애 좋게 살아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가까운 현실에서 오순도순 어울려 사는 모습을 그토록 기대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외갓집이다.

외가(外家), 외갓집, 그리고 우리가 즐겨 부르던 ‘애갓집’과 ‘애할매’는 지금도 남다르다. 외숙모와 사촌 형제들이 포근히 감싸 주는 곳이며 그리움의 1번지, 아련한 추억의 현장이 외갓집이다.

화순군과 곡성군 양쪽 끝 마을끼리 큰 산과 산을 넘어야만 만날 수 있었다. 한해 우리가 가면 그곳에서 왔다. 그쪽에서 못 오면 우리가 가서 만났던 아름다운 왕래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끈의 정점에는 '애할매'가 있었다. 행상을 하셨던 외할머니 일가와 친가는 6·25 피란 시절 곡성군 오산면 집단 수용시설에서 한 천막을 쓰게 되었다. 과년(瓜年·八八이니 16세)한 딸을 둔 할머니는 똘똘한 아버지에게 사위가 되어 달라며 중신을 섰다.

성품이 괄괄하기는 했으나 모난 데가 없어 화순 곡성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외삼촌이 산사람 누명을 썼을 때도 평소 인심을 잃지 않아 주위 분들이 외할머니를 보아 풀어 달라고 탄원을 할 정도로 붙임성이 대단하고 부지런했다.

백아산 지구 빨치산 활동이 끝나자 어머니가 19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 큰형이 나온 것은 24살 때로 6년째였다. 당시 자식 낳는 것을 최고로 여겼던 아버지께 몇 번이고 내침을 당했다. 그 때마다 할머니가 오셔서 “후처(後妻)라도 붙여줄 것이니 데리고만 있으라”고 말리셨다.

내 기억이 가물가물한 외할머니는 내리 여섯 손자 손녀를 낳을 때마다 집으로 오셔서 외동딸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하시던 행상을 접고 오셔서는 한달을 사시다가 산몰랭이를 넘으실 때는 500고지에 있는 밭을 매고 돌아가시기도 했고 틈이 있을 때는 몰래 곡성을 넘어 화순 쪽으로 오셔서 김을 매고도 가셨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외갓집에 발길이 뜸하면 죄(罪)로 가는 것이여! 느그들이 먼처 찾아 뵈야 헌다. 거근 니기 집이 고모집 밖에 더 되냐? 알겄제?”하시며 누차 강조를 하셨다. 삼촌이 아플 때나 아버지가 심하게 앓을 때도 우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후로 1년에 서너 차례는 호랑이 나온다는 검덕굴(黑石)을 넘었다.

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외갓집 간다고 하면 두말 않고 어머니와 우리를 보내주시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설날 오후 성묘를 일찌감치 마치고 욋등, 감난쟁이를 돌아 검덕굴 저수지 입구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석작에 손수 만드신 한과와 생선, 산적 따위를 넣어 보자기에 묶어 고운 한복을 입었고 누나와 손위 형, 나도 따라 나섰다. 다섯살 아래 막내 연순이는 누나가 포대기에 싸서 업었다. 형과 나는 토종닭을 한마리씩 묶어 손에 들었다.

저수지를 지나자 눈이 조금 쌓여 있을 뿐 별다른 제약이 없다. 나무 숲길을 통과하여 숨이 가쁘도록 오리(五里) 가량을 걷자 온몸에 땀이 뻘뻘 났다. 수천마리 양을 방목하여 키우는 목장 부근에 이르자 풀씨 밭이 넓게 펼쳐진다. 곧 예전 육남이네가 살았던 마을 터가 보인다.

이제 조금만 힘을 내서 대밭만 지나면 곡성군 삼기면이다. 그 때였다. 대밭을 지나면서 내 손에 힘이 떨어졌는지 책보에 묶인 닭이 훨훨 날아 대밭에 숨어버렸다.

“어어… 어. 저 달구 새끼가.”
“어쩐다냐. 카만 있어 봐. 자꾸 놀래키지 말고 찬찬히 모다 봐라.”

대밭이란 게 자칫 발을 헛디뎠다가는 고무신까지 뚫고 들어오는 끌텅에 찢기기 십상이다. 아이를 업은 누나는 그대로 서있고 어머니와 두 형제가 살살 접근하여 거리를 좁혔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닭이 놀라 퍼뜩 날아올랐지만 대나무 가지에 죽지가 걸려 힘없이 내려오자 형이 재빨리 달려가 움켜 안았다.

푸닥거리 한판을 하고 단단히 처매 다시 길을 나섰다. 대밭을 지나자 몰라보게 캄캄해졌다. 눈에 푹푹 빠진다. 화순 북면은 양지쪽이라 거의 눈이 녹았는데 북동사면에 접어들자 전혀 눈이 녹지 않았다.

“조심하거라와.”
“걱정 붙들어 매싯쇼.”
“금순이는 중간에 오고….”

셋째형, 누나, 나, 어머니 차례로 가파른 눈밭을 나뭇가지에 의지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윽!”
“조심혀.”
“암시랑토 안 해라우.”

약간 미끄러졌을 뿐 계곡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50여m 내려가는데 더디기가 말이 아니었다. 네시가 넘자 차츰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골짜기로 내려갈수록 위에서 눈사태가 나서 밀려왔는지 뭉텅이로 쌓여있다. 순간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셨는지도 모르도록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묻힌 길에서 옴짝달싹 못해도 평소 눈밭에서 조릿대를 쪄보았던 우리이기에 두말 않고 앞으로만 갔다. 게다가 근 백번 가깝게 다녔던 곳이라 눈 감고도 다녔던 익은 길 아닌가. 눈보라가 몰아치고 귓전이 떨어져 나갈 듯 매섭게 추웠다.

“악!”

조심성도 별로 없고 별일 없으리라 손 놓고 세번째로 따라가던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쭈욱 미끄러져 눈 속으로 사라졌다. 눈 터널을 뚫고 지나는 그 짜릿함. 닭은 이미 내 손을 떠나 어디론지 가버렸고 한참 뒤 15m 안에 숨어 있다가 밖으로 기어 나와 5m를 더 구른 뒤 얼음이 얼어 있는 계곡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가~”
“규환아~”

그제서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 여깄어. 한나도 안 아푸당께.”

위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동안 오르고 또 올라도 미끄러질 뿐이었다. 마침 그곳은 물이 자작자작 흐르던 곳이라 눈에 덮인 얼음에 발이 닿자 미끄럼틀이 되어 나를 실어 나른 것이었다. 결국 닭 찾기를 포기하고 계곡 밑으로 한참을 내려가다가 길에 가까워지자 기어 올라왔다.

효자 정재수는 아직도 분교가 된 우리 초등학교에 외로이 서있다. 하마터면 정재수 꼴이 날 뻔했지만 그 뒤로는 길이 열려 달음질로 내려갔다. 침침해질 무렵 아직 잔디가 듬성듬성한 외할머니 묘소에 들러 성묘를 했다.

외갓집에 평소보다 늦게 도착하자 걱정이 되어 산자락 방향 동네 어귀에 외숙모와 사촌 형제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얼싸안고 반겼다. 이웃에 사시는 이모님(어머니 사촌 언니)도 오셨다. 건넌 마을 쇠양치(쇠양치, 송아지. 예전엔 사람 이름을 동물로 흔히 불렀다) 삼춘도 우리를 맞는다.

정갈한 외숙모가 깔끔하게 차린 설 음식에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밤새 눈이 내렸다.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 푹 쉬고 가라는 터에 집안일이 걱정이었지만 사흘을 더 놀다가 아쉬운 외갓집을 떠났다.

우리 집보다 더 포근한 집, 그곳이 외갓집이다. 눈치꼬치 보지 않고 양껏 먹던 배추 물김치와 쌀밥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아련한 안식처를 올 설에도 외숙모 살아 계실 적에 꼭 찾아 뵈야겠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삽화를 그린 김용철 님은 <강아지를 부탁해> <공포탈출일기> <아싸! 똥파리> <느낌표> <아이러브햄스터> 등 50여 권의 어린이 만화집을 냈고 최신작으로 <학교 짱의 22가지 행동>이 있다. 홍어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삽화를 그린 김용철 님은 <강아지를 부탁해> <공포탈출일기> <아싸! 똥파리> <느낌표> <아이러브햄스터> 등 50여 권의 어린이 만화집을 냈고 최신작으로 <학교 짱의 22가지 행동>이 있다. 홍어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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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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