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번씩 죽음과 생명 사이를 숨가쁘게 오가며 지율스님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법륜스님이 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오마이뉴스 남소연
- 지율스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되었나.
"이 문제가 있기 전까지 지율스님과 두어 차례 만났을 뿐이다. 지율스님이 2차 단식으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던 2003년 10월이었다. 이병인 밀양대 교수가 '지율스님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부탁해 처음 만났다. 사실 그때까지 난 천성산은 물론이고 지율스님도 몰랐다.
그때 지율스님은 '10만 도롱뇽 소송인단'이 필요하다며 10만 명이 채워지면 단식을 풀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소송인단은 3600명이었고 10만명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토회 신도들에게 먼저 지율스님을 살려보자고 설득해 신도 중심으로 4일만에 10만 도롱뇽 소송인단을 꾸렸다. 그래서 지율스님은 단식을 풀었고, 그것이 지율스님과 나의 첫 인연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난 외국에 나가 있어 지율스님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는 것도 몰랐다."
- 정토회관으로 지율스님을 모시고 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
"스님을 안전하면서도 사람들의 오해를 받지 않도록 공개된 장소에 모시자고 도법스님과 문규현 신부님과 논의했다. 지율스님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1월 26일 지율스님을 설득해 정토회관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27일 <오마이뉴스>가 경기도 모처의 스님 거처를 확인하면서 일시적으로 지율스님의 마음이 흔들렸었다. 28일 다시 지율스님을 설득했고 29일 서울 정토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님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애를 썼다."
- 지금까지 지율스님을 보살피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 스님을 뵙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난감했다. 여러 정부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율스님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해 지율스님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면담을 요청하는 바람에 지율스님이 정토회관을 떠나려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내가 동물원 원숭이냐'며 많이 언짢아했다. 사전에 연락을 하고 찾아온 사람은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과 박세일 한나라당 의원뿐이었다."
- 천성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의 협상 창구가 있었는가.
"단일한 창구는 없었지만 몇 차례 접촉은 있었다. 이수일 위원장이 청와대 이강철 수석을 만났고 상황 설명을 했다. 또한 도법스님과 총무원 사회부장 스님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을, 나는 도법스님과 함께 총리실 민정수석 남영주 비서관을 만났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안되는 것은 안되는 일이니 지율스님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지율스님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고 정부쪽에서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도법스님은 총무원장님께 읍소해서 원장스님께서 종단적 차원에서 지율스님 살리기 기도를 하기로 했고, 전국 비구니회도 지율스님 살리기에 적극 나섰다. 그 외 전교조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각각의 채널을 가지고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는 정부가 어려워 하니까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 야당의 김덕룡, 박세일 의원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줄 것을 요청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 모두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해찬 총리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통해 면담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 총리가 직접 정토회관을 방문하기 전까지 만나지는 못했다."
- 천성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번 지율스님 살리기에 처음 물꼬를 튼 것은 도법스님, 문규현 신부 등이 주도한 종교인 참회단식이었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의 결단과 전국 비구니회의 참여등 불교계의 역할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교조, 도롱뇽의 친구들 등 시민사회 단체의 노력도 눈물겹다. 이번 지율스님 살리기는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기뻐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 문제로 오해와 갈등관계에 있던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희망이다. "
- 지율스님을 보살피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었나.
"솔직히 단식 90일을 넘기면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싶었다. 어떤 결론이 나든 설날 전에는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정토회 일정을 모두 취소하거나 설날 이후로 미뤘다. 지율스님도 천성산이 자신의 몸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아서 주장하면 안 되는 구나,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율스님의 가족들도 죽음을 대비해 며칠동안 정토회관에서 함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