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거리 하나 없는 생일도를 찾다

완도의 외로운 섬, 생일도 여행

등록 2005.02.06 22:09수정 2005.02.0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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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도는 완도의 다른 섬과는 달리 이름이 없다. 완도의 다른 섬들은 한가지씩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 신지도의 명사십리,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 예송리 해수욕장, 약산의 삼지부옆초 및 흑염소, 고금도, 노화도의 쌀 등.

그러나 생일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명한 해수욕장도 없고 교통도 좋지 않다. 그래서 선착장도 적고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다.


인터넷에서 생일도를 검색해 보면, 면적 1502ha, 인구는 546가구에 1335명, 이중 어업 인구가 78% 정도이고 동백나무, 후박나무 난대림이 무성하며 미역, 김들의 양식이 성행하다고 소개돼 있다.

완도의 여러 섬들을 둘러보았지만 생일도만은 가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금일을 거쳐 생일도에 들어 갈 기회가 왔다. 지난 3일 광주 집에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효천역에서 일행과 함께 출발, 마량에 도착하니 6시 20분 정도가 됐다. 교통이 많이 좋아졌다. 강진에서 마량으로 들어가는 길도 강진 읍내를 거치지 않고 외곽도로에서 바로 들어가니 시간이 많이 단축됐다.

강진 마량에서 새벽 7시에 금일·생일행 배를 탔다. 나는 차 뒷좌석에서 편히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2층에 있는 여객선실에 올라갔다. 내 생애 처음 들어가는 금일행이 괜히 설레었고 나도 오늘만은 섬사람이 되어 섬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객선 선실에서는 바닷바람에 시달리고 지친 검은 피부의 할아버지,할머니들과 젊은 여자들 몇 명이 있었다. 모두 어제 저녁에 배가 끊겨서 들어가지 못하고 마량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섬으로 들어가는 금일 주민들이다. 젊은 여자, 남자들 할 것 없이 모두 점퍼를 덮고 선실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들을 따라 나도 귀퉁이에 앉아 잠을 청했다. 배가 멈추어서 보니 어느새 배는 금일의 도장항에 도착해 있었다. 가는 날, 날씨가 좋지 않더니, 도장항은 찌푸린 날씨로 더욱 어둡고 칙칙한 포구로 보였다. 그리고 대개의 포구와는 달리 선착장과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장항에서 다시 많은 사람들이 탔다. 나는 이렇게 생일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생일도가 상당히 큰 곳일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배가 생일도를 거쳐서 마량으로 다시 가기 때문에 마량으로 가는 손님들이 많이 탄 것이었다.

생일도의 선착장은 생일면 여서리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포구다. 생일도 면 소재지도 날씨가 추워서 밖에 사람이 별로 보이지를 않았다. 생일도의 첫인상은 섬 중앙에 높다랗게 솟아있는 백운산이 이 섬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는 것. 그러니 농경지는 전 섬의 17% 정도이고 임야가 55%라고 했다.


날씨가 추울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한반도의 최남단인데 그렇게까지 추울까 하고 방심했었다. 아직 가시지 않는 겨울 기온이 상당해 체감 추위가 더욱 컸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산자락에 흰 구름이 낮게 깔려 침략군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보라가 내리쳤다. 이 섬에서 눈 보기란 그리 쉽지않다는데 우리가 생일도에 들어간 날 운 좋게도 눈이 내린 것이다.

a 생일도의 학사암

생일도의 학사암 ⓒ 조갑환

다음날 아침 우리를 안내하는 분들이 왔다. 약속대로 백운산 등반을 하자는 것이다. 광주의 아내에게 전화를 해 봤더니 광주는 눈이 많이 내려 교통이 마비됐다고 했다. 완도에서 두번째로 높다는 백운산(해발 487m)은 임도가 있어서 거의 중턱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다.

중턱에서부터 우리 일행은 등반하기 시작했다. 어제 이곳 생일도에 눈이 내려서 올라가는 오솔길에 눈이 내려 있었다. 미끄러워서 조심스러웠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잡목들이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저마다의 옷맵시를 뽐내는 것 같았다.

조금 올라가자 절이 하나 보였다. 생긴 지 400년쯤 되는 '학서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였다. 새벽 절의 분위기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고요했다. 스님 한분이 계신다는데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몇 달 전에 이 암자에 계시던 스님의 영력이 신통해, 인근의 암 환자나 불치병 환자들에게 기 치료를 해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오염원이 없고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산에서 수도하다 보면 누구나 신통력이 생길 것 같았다. 마당에 눈이 쌓였어도 누가 쓸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절 입구에 미륵불상이 있었는데, 그 발 밑에 약수가 흘러나와 미륵불이 주는 물처럼 신비한 감이 있었다.

약수를 떠서 한바가지 마셨다. 날씨는 추운데 물은 그렇게 차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라 해서 한바가지를 마시니 무슨 보약을 먹은 것처럼 힘이 절로 나는 것 같았다.

정상에 올랐다. 봉우리가 두개 있었다. 전남 관내 남해의 섬들이 한눈에 보였다. 지도상으로는 상당히 먼 섬인 것 같지만 정상에서 보니 완도, 청산도, 신지도, 섬들이 바로 코앞이다.

우스개소리로 용을 쓰고 건너 뛰면 뛸 만한 거리란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아니다. 아침 날씨가 안 좋아서 해는 구름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가지고간 디지털 카메라를 연신 눌러댔다.

a 생일도의 백운산에서 바라본 해돋이

생일도의 백운산에서 바라본 해돋이 ⓒ 조갑환

다음날 아침에는 용출리라는 바닷가 마을에 갔다. '용량도'라는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해 마을 이름이 '용출리'라는 전설이 있단다. 자갈밭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새벽에 무슨 일인지 나이 든 어른들이 방파제에 나와 있었다.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드세다. 붉은 해가 섬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완도에서는 많은 섬들이 있어 깨끗하게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보기가 어렵다.

용출리 갯돌 해수욕장은 보길도 예송리 해수욕장처럼 자갈밭 해수욕장이다.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송리보다 훨씬 좋았다. 예송리는 자갈밭이 경사가 지고 바로 수심이 깊어 해수욕하기에 적당한 해수욕장은 아니다.

생일도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특히 세명이 인상에 남는다. 한 분은 면장님이시다. 도청에서 근무하시다가 승진해서 완도 생일면에 부임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생일도에 한글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한글 학교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아직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 한글학교 학생 중에 나이가 42세인 사람이 둘이나 됩니다. 우리 학생 중에 자기 이름도 정확히 모른 채 57년을 살아오신 분도 있습니다. 자기 이름이 김푸자라고 합디다. 자기는 김푸자로 57년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적을 찾아보았더니 김부자더군요. 그래서 알려 줬지요.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김푸자가 아니라 김부자입니다'라고."
"50대, 40대는 그래도 문교부 혜택을 받았을 텐데. 아무리 학교를 안 다녔더라도 한글을 아직까지 모르고 살았다니 참 신기하군요."

정말 신기했다. 요즘 애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배워 버린다. 인터넷이 발달해 지구가 한 동네처럼 살아가는 세상에 40대, 50대의 장년층에서 까막눈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면장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서야 '이곳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이 이렇게 도로가 생기고 전기가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이 섬에 손수레가 다닐 길도 없었습니다. 마을 간에 운송 수단은 단순히 지게뿐이었습니다."

a 생일도의 바다

생일도의 바다 ⓒ 조갑환

생일도에서 만난 또 한 사람은 현대식당 주인 아주머니다. 현재 나이가 53세인데, 젊었을 때 남편이 바람나 도망가서 애들 둘을 대학까지 보내며 혼자서 키웠다고 했다.

음식 솜씨도 좋고 어떻게나 구수하게 애기를 잘 하던지, 덕분에 저녁식사를 즐겁게 했다. 그 분은 좋은 남자만 나타나주면 결혼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내가 광주에서 좋은 홀아비 있으면 소개 시켜 드린다고 농담으로 말했는데, 정말로 기대를 하는 눈치다.

또 한명은 최아무개씨인데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생일도의 '시라소니'였다. 젊었을 때 완도를 주름잡던 이야기들을 점심 시간 내내 들려주었다.

젊었을 때 당수가 4단이었다는 그 분은 옆 섬인 금일도 청년들하고 싸움하던 얘기, 완도읍의 깡패 대장을 한방에 날려버리니, 그 큰 덩치가 넓적 엎드리며 "형님"하더라는 얘기를 재미나게 했다.

지난 5일 우리는 오후 3시 반 배를 타고 약산도로 나와서 고금도로 이동, 배를 타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주의보가 내려서 12시 배가 마지막 배라는 소식을 들었다. 12시 배를 타려고 부리나케 짐을 챙긴 후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 내용은 12시 배마저도 운행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섬이란 곳이 이렇구나. 절실하게 섬사람들의 애환을 알 수 있었다. 폭풍주의보가 내리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 섬이다.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오후에야 다시 바다가 잔잔해져서 나올 수 있었다.

다시 금일 도장항에서 강진 마량으로 가는 배에 금일 사람들이 많이 탔다. 70대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분이 올라오셔서 내 옆에 오시기에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내 후배 아버지가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금일, 생일에 오면서 그 후배에게 '아버지께 인사나 드리러 가야할 텐데'라고 인사 치레로 말했었다.

그런데 그 후배 아버지를 우연히 금일 도장항에서 만난 것이다. 후배 아버님이 또 얘기를 잘 하셨다. 집안 사정들과 금일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마량까지 한시간 뱃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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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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